유성운 인동전자 회장
“그라파이트(graphite) 분야에서 퀄컴과 같은 글로벌 ‘넘버1’ 기업으로 우뚝 서겠습니다. 세계 어느 기업도 넘볼 수 없는 원천기술을 무기로 동양의 작은 기업이라는 한계를 넘어 세계 시장으로 영토를 확장하겠습니다.”
유성운(53·사진) 인동전자 회장은 6일 경기도 오산가장산업단지 본사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미국의 G사가 독점하고 있었던 천연 그라파이트를 대체할 수 있는 복합 그라파이트를 개발, 올해 삼성전자(005930)의 75인치 평면형 TV 공정에 납품키로 하는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업체들로부터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라파이트는 TV, 노트북, 스마트폰 등의 전자기기에서 열을 방출(방열)하기 위해 사용하는 핵심 소재로, 지금까지는 506개 관련 특허를 갖고 있는 G사 독점했던 시장이다. G사는 흑연을 원료로 하는 천연 그라파이트를 독점 공급했고, 석유화학제품을 태워서 만드는 인조 그라파이트는 수많은 회사들이 공급하고 있지만 가격이 높은 편이다. 천연 그라파이트는 흑연을 원재료로 쓰다 보니 인조 그라파이트에 비해 가격이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지만 한 회사의 독점 공급으로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약점이 있었다.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던 유 회장은 어릴 적부터 빠졌던 무선조종(RC) 비행기 취미를 사업화하면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작은 가게를 차려 놓고 판매만 했다가 나중에 무선조종(RC) 비행기를 이용한 광고 제작에 참여하며 큰 돈을 벌었다. 한 번은 일본에 놀러 갔다가 비비탄총에 빠져 수입해 대박이 나기도 했고, 커피의 시장성을 보고 금성전자 커피 자판기 대리점도 운영했다. 피부미용실 화장품 브랜드 ‘미가람’을 인수하기도 했고, 중국에서 생수 사업을 하면서 재미도 봤다. 이렇듯 다양한 사업을 하면서 유 회장은 레이싱을 취미로 가졌는데 마력을 높이면 열이 너무 올라가 시쳇말로 차가 뻗어버리는 일이 잦은 게 고민이었다.
그는 “방열 소재로 그라파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흑연을 소재로 하든, 석유화학을 소재로 하든 그건 기존 플레이어가 독점하는 시장이었다”며 “2013년 여름 무더위 속에서 포항제철에서 쇳물 작업을 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쇳물 위로 까만 슬러지가 눈길을 사로 잡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쇳불에서 나온 슬러지는 섭씨 1,500도에서 타고 남은 찌꺼기인 만큼 순도가 높을 뿐더러 제철소에서 돈을 주고 버리는 산업 쓰레기니 값싼 원재료로서도 매력적이라고 판단했다. 미국 G사의 천연 그라파이트와는 원재료 자체가 달랐으니 당연히 506개의 특허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니 그걸 가져다 그라파이트 필름만 만들 수 있으면 ‘대박’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기대처럼 개발이 쉽지는 않았다. 카이스트 재료공학과 교수와 산학협력으로 몇 년을 매달렸지만 슬러지 재료를 압착해 필름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유 회장은 “재료 자체는 흑연보다 순도가 높아 방열 기능이 2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왔지만 3년간 연구개발에 매달려도 압착이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처음에는 대학 연구실에서만 실험을 진행하다가 성과가 없자 시트지 필름 제조업체 라인을 통째로 빌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실험을 진행했다. 유 회장의 간절한 열망이 하늘에 닿았을까. 우연히 슬러지를 압착한 필름을 개발했고, 국내 굴지의 특허법인에 의뢰해 G사의 특허에서도 벗어난 발명 특허라는 공식 인증도 받았다.
유 회장은 “2016년 가을께 제품 개발 후 삼성전자 측에 시제품을 보냈더니 생산기술연구소에서 진행한 실험에서 방열 속도가 2배 이상 나온다는 결과물이 나왔다는 답변이 왔다”면서 “하지만 법무팀의 승인이 떨어져야 사용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고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당초 한 두 달이면 끝날 것으로 기대했던 삼성전자의 법률 검토는 1년을 넘겨 결국 14개월이 흐른 지난해 말에야 마무리됐다. 삼성전자에 납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직원들을 채용하면서 진용을 갖췄던 유 회장은 기나긴 기다림 속에 법인 이름을 ‘인동(겨울을 인내하다)’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유 회장은 “삼성전자가 인동의 복합 그라파이트를 사용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업계에 전해지자 삼성의 다른 계열사는 물론 LG전자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은 물론, 대만의 팍스콘, 일본의 소니와 도요타, 중국의 알리바바 등에서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면서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 그들이 시키는 대로 납품하는 처지지만 원천기술을 확보하면 우리가 시장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유 회장은 어느 기업도 흉내 낼 수 없는 원천기술을 무기로 시장을 좌우하는 ‘그라파이트 시장의 퀄컴’이 되겠다는 포부다.
현재 공정으로는 삼성전자의 75인치 TV 신제품에만 겨우 물량을 맞출 수 있다. 오산 공장은 1개 라인만 갖추고 있기 때문에 24시간 가동한다고 해도 물밀듯이 밀려오는 주문을 수용할 수 없다. 인동전자는 베트남 호치민 외곽 지역에 1만 4,200㎡ 규모의 땅을 매입, 우선 연내 10개 라인을 갖춘 생산공장을 가동한다는 계획이다.
유 회장은 “현재 그라파이트 시장은 22조원 규모지만 매년 3조~4조원씩 안정적으로 늘고 있다”면서 “늘어나는 시장만 감당해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며 웃었다. 국내 라인 하나만 가동하는 올해는 30억원의 매출에 그치지만 내년에는 450억원, 2020년에는 매출 1조원의 유니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게 유 회장의 전망이다. 이를 위해 내년에는 기술특례상장을 추진, 자금력을 확보해 생산량과 회사 볼륨을 끌어올린다는 복안이다.
/오산=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