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을 제조·판매하려면 정신감정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한동안 뉴스 지면을 뜨겁게 달군 적이 있다. 화장품을 수입해 팔더라도 사업자가 정신질환자가 아니라는 의사의 진단서를 내도록 한 화장품법 시행규칙은 당시 ‘손톱 밑 가시’의 하나로 지목됐다. 물론 이 규제는 2년 전 사라졌다. 여론의 뭇매 때문에 어이없는 의무조항이 삭제됐을까. 업계의 몇몇 고수들은 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사실 당시 화장품 사업에 과감히 뛰어든 몇몇 대기업·중견기업 덕분이라는 얘기다. 규제 부서의 공무원이 대기업 사장에게 정신감정 진단서를 가져오라고 요구하기 껄끄러웠으니 모두에게 규제를 풀 수밖에 없었다는 나름의 해석이다.
규제를 푸는 데는 원칙이 필요하다. 서민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규제개혁을 한다고 해도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 갈래로 나뉘기 때문이다. 규제혁신의 본질에서 벗어나면 으레 드러나는 것이 있다. 대기업에만 기회를 준다는 반기업 정서다. 박근혜 정부 때 대표적인 규제완화 사례로 꼽았던 푸드트럭이 그렇다. 서민생계를 돕고 청년 일자리를 만들겠다며 푸드트럭을 허용했는데 난데없이 대기업과 백화점이 뛰어들 준비를 하면서 무엇을 위한 규제혁신이냐는 논란을 낳았다. 급기야 대통령이 직접 대기업에 자제를 경고하고 나섰다.
역대 정부가 규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데는 현장과의 괴리가 큰 규제 행정과 공무원의 소극적인 자세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결국 화살은 규제를 다루는 공무원의 해태(懈怠)로 돌리게 되는데 사실 그들도 할 말은 많다. 새로운 사업이나 제품을 승인하려면 법과 규정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기준과 전례가 없다면 공무원이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규제를 풀어줬다가 소수 집단에만 특혜를 준다는 오해를 사거나 국민안전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질까 하는 뒤탈 걱정에 소극적 보신주의는 더욱 단단해진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규제개혁 계획보다 결과를 내놓으라면서 정부 부처를 다그쳤다. 연초에는 현장규제의 32%는 법·제도를 바꾸지 않고 풀 수 있다는 지적도 했다. 현 정부도 규제혁신이 다급하다. 하지만 강하게 주문할수록 현장은 바짝 엎드린다. ‘전봇대’ ‘손톱 밑 가시’를 운운한 과거 정부도 그랬다.
공무원에게도 ‘규제혁파’라는 땡볕 세례에 소신과 보신을 함께 챙길 수 있는 그늘막이 필요하다. 반기업 정서에 따른 오해와 갈등 사안이 아니라면 규제를 마음 놓고 풀 수 있게, 국민안전을 해칠 가능성에는 소신을 갖고 ‘노’할 수 있게 권한은 주고 책임은 정치권과 나눠 지는 것이다. 규정을 바꿔 일의 결과가 잘못되더라도 고의나 중과실이 아니면 책임을 면하거나 감해주는 ‘적극행정면책제’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개혁의 미약한 첫걸음은 으름장이 아닌 그들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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