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 의혹이 실제 실행 단계까지 이른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법원 내부에서조차 더 늦기 전에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법부 윗선에 대한 압수수색영장 기각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던 판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7일 법조계에 따르면 검찰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등에 대해 압수수색영장을 다시 청구하기 전에 사법부가 수사에 협조해야 한다는 의견이 11년 차 이상 중진급 판사들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중진급 판사들은 10년 차 이하 판사들과 달리 영장전담 부서에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직접 진행해본 경험이 있다. 이들이 수사 협조를 촉구하는 배경에는 더 이상 영장을 기각할 명분이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앞서 법원은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처장 등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하면서 “법원행정처의 계획일 뿐 구체적으로 실행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범죄 소명이 부족하다”는 논리를 폈다. 상당수 판사도 이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검찰이 외교부 등을 압수수색하면서 정황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지자 판사들의 태도가 변하는 분위기다.
13년 차인 서울의 한 지법 판사는 “소송기록을 담당 재판부보다 먼저 받아보고 기존에 없던 해외 파견 자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범죄 소명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법원이 구속영장도 아니고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해서 사법부의 신뢰만 더 떨어뜨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외교부에만 영장을 발부한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일반적인 사건을 다룰 때도 영장심사는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되고는 한다”며 “법원행정처와 마찬가지로 외교부도 자료를 임의제출하고 있는데 외교부에만 영장을 발부해 법원이 논란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한 지법 판사는 “검찰이 관련 증거를 언론에 흘려 압수수색영장을 기각하지 말라고 시위하는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압수수색 영장 기각은) 사건의 본질을 다루기도 전에 법원의 이미지만 손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판사들은 영장을 발부해 수사에 협조하는 것과 재판거래를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예컨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재판을 내세워 로비했더라도 사건을 판결하는 대법관이 해당 사실을 몰랐다면 거래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앞서 검찰은 2013년 주철기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임 전 차장을 면담한 자리에서 일제 강제징용 소송 경과에 대한 설명과 함께 법관 해외파견 민원을 접수한 뒤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에게 전달한 사실을 확인했다. 또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사건 소송기록을 담당 재판부보다 미리 받아본 것으로 파악했다. /백주연기자 nice89@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