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들어올 때마다 하겠다고 큰소리치지만 잘 안 되는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중소기업 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규제 완화다. 중소기업 정책이 안 되는 것은 정부가 기업의 시장경쟁력을 키우려 하지 않고 돈을 퍼줘 정부에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규제 완화는 어느 대통령이든 규제 혁파, 전봇대 뽑기, 혁명적 발상 등 온갖 수사를 동원해 추진해보려 하지만 몇 걸음도 나가지 못한다. IMF 사태 이후 들어선 새 정부가 규제의 절반을 무조건 없애라고 했더니 공무원들은 없애야 할 인허가 규제들은 그대로 두고 있어야 할 감독 규제들을 없앴다. 감독이 제대로 안 돼 여기저기서 사고가 터졌고 감독 규제를 원상복구할 수밖에 없었음은 불문가지다.
혁신을 위한 제도개혁은 뒷전에 두고 가격과 수량 결정에 직접 개입하는 반시장적인 경제정책들을 추진해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하자 정부는 규제 완화를 통한 혁신으로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역대 정권의 단골 레퍼토리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유지돼야 할 규제인 은산분리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정책이 제일 먼저 튀어나오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은산분리 규제의 완화가 왜 바람직하지 않은지 이해하기 위해 경제의 큰 윤곽부터 보는 게 좋겠다.
한 나라의 경제 흐름을 얘기할 때 전체적으로 얼마나 소비하고 저축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이 거시경제의 영역이라면 저축된 돈을 어디에 얼마나 투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은 미시경제의 영역이다. 사업별 투자 결정은 실물기업들이 하고 저축과 투자를 연결하는 자금조달은 금융기업들이 한다. 그런데 실물 부문이 경기순환을 겪으면서 빚을 갚지 못하는 사태가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은행처럼 금융시스템이 작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금융기업들이 이를 감당하지 못해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국민의 세금으로 이를 메워주는 일이 반복된다.
금융기업이 자금조달 과정에서 실물기업의 투자를 잘 선별해야 금융위기를 줄일 수 있다. 옥석을 가리는 일이 금융기업의 가장 큰 기능이다. 금융기업이 실물기업과 야합해 무분별한 투자를 하게 되면 이는 고스란히 세금을 내는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실물기업이 은행을 지배하게 되면 투자 성공의 과실은 실물기업이 가져가고 투자 실패로 인한 손해는 국민이 부담하는 변태적인 구조가 만들어져 국민을 상대로 하는 금융사기 면허증이 발급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를 막기 위해 실물기업의 주인인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하고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은산분리다.
그러면 은산분리 규제 완화가 혁신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정부는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온라인으로만 영업하는 인터넷은행을 허가했고 이를 키우기 위해 산업자본의 투자를 유도하겠다고 한다. 인터넷은행은 기술혁신을 도입해 비용을 줄이고 업무를 더 효율적으로 하려는 금융기업일 뿐이다. 인터넷은행을 위해 은산분리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다. 은산분리는 인터넷은행뿐만 아니라 모든 은행에 적용되기 때문에 이 논리는 더욱이 맞지 않다.
혁신성장을 위한 큰 그림을 보자. 우리나라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성장하던 개발 연대에 정부는 국내에서 저축된 돈과 해외에서 빌린 돈을 소수 재벌기업들에 몰아줘서 특정한 산업들에 투자하게 했다. 여기서 거대 산업자본들이 형성됐다. 전 세계적으로 혁신은 벤처기업들이 선도하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재벌체제 내에서의 혁신이 주가 되고 벤처 기업에 의한 혁신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눈에 잘 보이지는 않으나 재벌체제의 그늘에서 많은 잠재적 혁신들이 사장되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 그래서 혁신성장을 위한 경제개혁의 핵심과제는 재벌체제의 극복이라고 본다.
재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투자 결정이다. 여기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실물 부문의 부실화로 인한 주기적 금융위기를 막으려면 건전한 금융으로 재벌의 투자 결정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 은산분리는 이를 위한 중요한 장치 중의 하나다. 은산분리 규제 완화는 소탐대실하는 어리석은 정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