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중국 화웨이와 ZTE의 5세대(5G) 통신장비 도입을 금지했다.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인 5G 상용화가 가시화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나서 중국산 5G 장비 도입을 전면 금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영국도 보안 문제로 화웨이와 ZTE를 경계하고 있어 이번 결정이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산 장비의 도미노 퇴출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호주 정부는 23일 성명에서 외국 정부의 지시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공급업체가 국내 5G 통신망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호주 정부는 “정부의 임무는 국가 핵심기술을 보호하는 것”이라며 “정부와 산업계는 호주의 정보와 통신 보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명에서 중국이나 특정 기업을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호주 정부 관계자는 이번 조치가 화웨이를 겨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화웨이와 ZTE는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운 민영기업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공산당 간부들이 임원 자리를 차지하며 이 기업들을 간접적으로 통제해왔기 때문이다.
호주 정부가 3년 전부터 준비해온 통신분야안보개혁(TSSR)이 이번 결정의 결정적 근거가 됐다. 호주 정부가 지난 2015년 6월 발표한 TSSR은 통신장비 업체들에 확인되지 않은 접근과 개입을 차단하는 의무를 부여하는 내용으로 이 계획은 법으로 제정돼 지난해 9월 의회를 통과했다. 법은 다음달에 발효될 예정이다.
호주 정부가 2012년 화웨이의 국내 광대역통신망 설비 제공을 금지하는 등 보안 문제를 둘러싼 호주와 중국의 대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중국은 법적으로 기관이나 개인이 국가 정보활동을 지원하도록 요구해 각국에서 안보 위협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호주는 지난해 노동당의 샘 다스티아리 상원의원이 중국 기업으로부터 로비 자금을 받고 남중국해 분쟁과 관련해 중국의 입장을 옹호했다는 논란이 일어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부쩍 강화하고 있다.
5G 선도자를 자처하며 상용화를 주도하려던 화웨이는 호주 정부의 결정에 대해 “소비자들에게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화웨이와 긴밀히 협력해온 이동통신사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호주 양대 이통사인 보다폰과 옵터스가 이미 화웨이의 5G 장비를 시험 운영하는 등 화웨이 통신장비 공급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호주 보다폰법인의 수석전략책임자인 댄 로이드는 이번 결정에 대해 “장비투자 계획에 대한 불확실성을 야기했다”고 비판했다.
시장에서는 이번 결정이 호주 한 나라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등은 그동안 중국의 안보 위협을 꾸준히 제기하면서도 중국의 특정 기업을 자국 5G 시장에서 공식 배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호주의 이번 조치로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나 중국에 대한 경계를 높이는 영국이 이에 동참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정부기관에 중국 기업 제품 사용 금지를 명령하는 ‘2019년 국방수권법’에 서명한 데 이어 자국 통신사들에 중국산 5G 장비를 도입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영국 정부도 지난달 보고서에서 “중국 화웨이의 모바일광대역 장비 엔지니어링 프로세스에서 결함이 발견됐다”며 영국 통신 네트워크가 안보 위협에 노출돼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미국 CNN방송은 “미국과 영국이 (중국 장비의 안전성을) 면밀히 조사하는 과정에서 호주의 금지 결정이 나온 것”이라며 “이들 국가에서도 화웨이와 ZTE 제품이 국가 안보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해왔다”고 설명했다.
화웨이는 전 세계 통신장비 시장의 28%를 차지해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스마트폰이나 첨단산업에서도 선두에 올라서겠다는 야심을 드러내며 각국을 위협하고 있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