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타계한 지 올해로 20주기를 맞았다. 고인을 생각하면 자동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강렬한 기억이 있다. 작고하시기 1년 전인 지난 1997년 9월,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관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회의 모습이다. 당시 나는 한 신문사 경제부 기자로 그 회의를 취재하고 있었다. 고인은 불과 석 달 전 폐암으로 폐를 절개하는 수술을 받은 직후였다. 그런 까닭에 이날 회의를 주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많았지만 그는 산소호흡기를 코에 꽂은 모습으로 평소처럼 회의를 이끌었다. 때때로 숨이 가빠지는 듯 호흡기를 사용하는 모습은 이날 회의의 무거운 분위기를 더욱 비장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당시 한국 경제는 한보·삼미·진로그룹이 연쇄 도산하면서 외환위기라는 벼랑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외부활동보다 요양이 필요했는데도 그는 휠체어를 타고 청와대에 들어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경제위기 대응방안을 건의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어쩌면 고인은 두 달 뒤에 닥쳐온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파국을 예견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필사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명문 시카고대 경제학 석사 출신인 그는 대학 시절 한때 경제전문 칼럼니스트를 꿈꿨을 정도로 전문가적 식견을 갖고 있었다. 청와대 면담에서 고인은 “경제가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할 정도로 어렵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고인은 미래·지식·인재의 중요성을 유난히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기업과 국가의 미래가 모두 인재에 달렸다고 보고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을 통해 해외 유학에 아주 파격적인 지원을 했다. 그는 유학생에게 “최고의 대학에서, 최고의 학문을 배우고, 최고의 이론을 익힌 다음에 한국에 돌아와 사회에 기여하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고인은 타계하면서 “내가 죽으면 반드시 화장하고 훌륭한 화장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했고 유족은 이를 따라 세종시에 장례시설을 지어 기증했다. 당시에는 일반인들도 화장을 기피하던 분위기였기에 그의 유지는 큰 사회적 울림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평생 기업을 일궈온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스스로 입증하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