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이 31일 서울 재동 헌재 청사에서 열린 ‘헌재 30주년 기념식’에서 각자 서명한 한글판 헌법책자를 펼쳐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 기본권 수호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하는 헌법재판소가 9월1일로 30주년을 맞는다. 9월은 유남석 재판관의 신임 헌법재판소장 취임을 비롯해 5명의 재판관 교체가 예고돼 있어 헌재 역사에 중대한 변곡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법조계에서는 오는 2023년까지 이어질 6기 재판부를 구성할 후보자 상당수가 진보 성향 단체 출신이라는 점에서 낙태·동성애·국가보안법 등 그동안 찬반 여론이 충돌했던 주요 사건에 대해서도 진보적 판단이 나올 공산이 크다고 관측하고 있다.
헌재는 31일 서울 재동 청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주요 인사 180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문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헌재가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인 악법들을 위헌으로 결정할 때마다 국민의 삶은 좋아졌다”며 “헌재는 국민의 기본권에 대해서는 더 철저해야 하고 국가기관의 불법적 행위에 대해서는 더 단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헌법은 완전무결하거나 영원하지 않고 헌법에 대한 해석 역시 고정불변이거나 무오류일 수 없다”며 “시대정신과 국민의 헌법 의식에 따라 헌법 해석도 끊임없이 진화하는 것이라 믿는다”고 강조했다.
이진성 헌재소장은 “더 폭넓은 조사, 한층 깊이 있는 사색과 연구, 치밀한 논증, 보수와 진보의 분류에 휩쓸리지 않는 균형감각을 통해 결정의 설득력을 높이겠다”며 “헌재가 우리 후손들이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헌법환경을 이뤄가겠다”고 역설했다.
법조계에서는 무엇보다 헌재소장을 비롯해 재판관 5명이 교체되는 9월 6기 재판부 출범을 기점으로 헌재 결정의 방향이 달라질지 주목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새 헌재소장으로 지명한 유남석 재판관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이 재판관으로 추천한 김기영 서울동부지법 수석부장판사 등이 모두 ‘우리법연구회’ 등 법원 내 진보 성향 판사 모임 출신이기 때문이다. 또 신임 재판관에 지명된 이석태 변호사도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회장, 참여연대 공동대표, 세월호특별조사위원장 등을 거친 첫 순수 재야 인사라는 점에서 누구보다 색깔이 강한 인사로 평가된다. 이은애 전 서울가정법원 수석부장판사가 재판관에 취임하면 여성 재판관이 2명으로 늘어 양성평등 관련 사건에 대한 헌재의 관점도 달라질 수 있다. 30주년의 의미가 단순히 햇수로 그칠 게 아니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헌재는 최근 들어 과거 보수적으로 내렸던 판단을 뒤집는 결정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국회·법원 앞 집회를 금지한 집시법을 모두 위헌으로 해석한 것을 비롯해 경찰의 최루액 물대포 발사도 신체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 공권력이라고 판단했다. 지난 6월에는 대체복무제를 인정하지 않는 병역법 제5조 1항을 헌법불합치로 판결해 ‘여호와의 증인’ 등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퇴로를 열어줬다.
법조계에서는 6기 재판부부터는 예전보다 한층 더 진보적 관점에서 사건들을 심리할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 새 재판부 판단의 몫으로 남은 주요 사건은 낙태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업무방해, 군 동성애, 국보법상 찬양·고무 조항 등이다. 특히 이 가운데 군대에서 동성과 합의하에 항문성교를 해도 처벌하게 한 군형법 관련 사건은 이번에 재판관으로 지명된 이석태 변호사가 대리인 단장을 맡았다. 그는 민변 회장 시절 국보법 완전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청와대 앞 100m 이내 집회를 금지한 법 조항이 잘못됐다며 참여연대가 낸 헌법소원도 최근 유사 판결에 비춰볼 때 위헌 판단 가능성이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 노동조합 업무방해 사건은 양승태 사법부가 보고서 등을 빼돌린 정황이 최근 드러나면서 관심이 늘어난 사건이다.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6기 재판부는) 고위법관 출신 일색이었던 보수적 구성에서 벗어나 다양성이 확보될 것”이라며 “앞으로 헌재가 기본권 보장, 권력 견제라는 본연의 사명에 보다 충실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