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은 공평했다.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도시뿐 아니라 산과 들이 펼쳐진 농촌도 더위 앞엔 버텨낼 재간이 없다. 귀촌 생활 3년여동안 에어컨 없이 지냈건만 이번엔 달랐다. 그나마 시골생활은 가까운 곳에 더위에 찌든 몸을 쉴 만한 계곡이 있어 큰 위안이 됐다. 1,000년 은행나무가 자리잡고 있는 용문산 계곡, 상원사 근처 상원계곡, 중원산과 도일봉 일대에 위치한 중원계곡 등 차로 15분~2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시원한 쉼터가 있다. 이번 여름엔 용문산 근처 계곡에서 물놀이하며 이 더위를 이겨냈다. 가을이라는 손님을 위해 자리를 내주는 9월을 맞아 주변 계곡들을 소개할까 한다.
용문산관광단지 근처 용계계곡에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사진 위). 끝이 안보이는 식당 테이블엔 어느 기업에서 단체로 야유회를 온 것처럼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여름을 즐기고 있다.
1.용계계곡
용문산관광단지 입구에서 우측길로 빠져나가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계곡이 나온다. 다른 지역도 비슷하겠지만 이곳도 계곡 옆엔 식당들이 자리잡고 있다. 성수기 때엔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계곡 옆 테이블을 잡기 쉽지 않다. 우리네 사는 모습이 뭐 별거 있을까 싶지만 평상 위에 앉아 바가지 요금 같기만 한 백숙과 오리주물럭을 주문해 가족이 오손도손 먹는 것은 소박하지만 참 별난 풍경이다. 조금 더 물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또다른 세계다. 아이들이 물놀이할 때 어른들은 시원한 맥주 한잔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여름을 즐긴다. 폭염에 비도 전혀 내리지 않았는데 계곡의 물은 물놀이하기 적당하게 차있다. 참 마음 넉넉한 자연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에 위치한 상원사 입구(사진 위)와 울창한 나무 숲이 지붕처럼 덮혀있는 상원계곡(아래)
2.상원계곡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쪽에 있는 상원사. 고려시대에 지어진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의병봉기 때 일본군의 방화와 6.25전쟁 시절엔 용문산 전투를 겪으면서 다시 불에 타 없어지는 등 역사의 질곡이 그대로 담겨 있는 사찰이란다. 깊이 자리잡은 곳인만큼 사찰 바로 옆으로 흐르는 계곡은 나무로 둘러싸여 빛이 새어 들어올 틈이 없다. 이곳은 여느 계곡과 달리 식당영업을 하지 않는다. 그 덕분인지 강원도의 깊은 계곡처럼 물이 맑고 깨끗하다. 곳곳에 아기자기한 소가 있고 흐르는 물에 발만 담그고 있어도 더위는 딴 나라 얘기가 된다. 내년엔 이곳에 더 자주 와 여름을 나볼까 싶다.
8월 끝자락에 쏟아진 호우로 제법 불어난 중원계곡(사진 위)을 들어서면 아기자기한 돌탑(아래)들이 보인다
3.중원계곡
양평군 용문면 조현리에는 주민들의 관심과 노력 덕분에 공원 같은 계곡이 자리잡고 있다. 자연과 사람이 잘 협력하면 이런 환경을 유지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듯하다. 계곡 입구에는 제법 넓은 주차장과 갓길에도 차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용문산 동쪽에 솟아있는 중원산과 중원산을 마주한 도일봉도 등반할 수 있다. 특히 도일봉은 양평군에서 가장 수려하다는 중원계곡을 품고 있다. 중원산도 계곡을 끼고 있기는 마찬가지. 안내도에는 ‘계곡이 시작되는 상현마을에서 중현폭포까지는 계곡미가 대수롭지 않으나 폭포를 지나 1km를 더 들어가면 계곡이 갈라지는데 여기서부터 계곡본류는 울창한 수림과 함께 크고 작은 폭포가 연이어 숨은 비경을 연출한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계곡이 시작되는 이곳이 난 좋다. 아기자기한 돌탑과 햇빛을 가려주는 자리, 그리고 계곡 물흐르는 소리가. 좀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은 탐험정신도 좋지만 지금 여기에 만족하고 싶다.
용문산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계곡들은 저마다 비슷비슷할 수 있지만 그 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 함께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고맙게도 아직 우리를 같이 살아갈 벗으로 생각해주는 산, 계곡은 부탁한다. 날 외롭게 만들지마! /최남호기자 yotta7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