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에세이] 누구를 위한 포괄수가제인가

이성종 가톨릭대 성빈센트병원 산부인과 교수
대한산부인과학회 포괄수가제소위원회 간사


자궁·난소 관련 수술, 제왕절개술 등 부인암을 제외한 산부인과 수술은 대부분 첨단 치료기기와 좋은 의약품의 사용이 제한되고 있다. 시행된 지 20년가량 된 포괄수가제라는 건강보험 지불제도의 적용을 받고 있어서다. 이 제도는 수술의 난이도·소요시간과 환자의 상태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의료기술·치료재료의 발전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환자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질 좋은 치료보다 수가(酬價·의료 서비스 가격)를 지불하는 쪽의 행정편의가 더 고려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갖게 된다. 숱한 제도상의 문제점 때문에 산부인과 진료 현장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포괄수가제는 환자들의 선택권도 무시한다. 일선 진료 현장에서 환자들의 불편감 및 개선안 요청을 종합해 보완이 필요한 포괄수가제의 많은 문제점 중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산모나 거대 자궁근종을 가진 여성이 출산 또는 수술 중 출혈량이 많으면 빈혈 교정을 위해 수혈을 하거나 철분제를 정맥투여해야 한다. 하지만 포괄수가제 때문에 별도로 청구할 수 없어 의료기관이 손실을 떠안아야 한다. 혈액 질환으로 수술을 받기 전 대량의 혈소판 수혈 등이 필요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환자의 상태가 중해 열심히 치료했는데 관련 비용을 청구할 수 없어 손해가 발생하는 현실은 매우 불합리하다. 환자의 특성에 따른 최선의 치료를 할 수 있게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자궁 질환을 앓는 여성은 흔히 요실금, 골반장기탈출, 질 이완 질환을 동반한다. 이 경우 비뇨기과·외과 등 다른 과 의사들과 협진 수술을 하는데 포괄수가제는 동반 질환 수술에 쓰는 의료재료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협진 수술을 하는 의료기관은 협진 수술료 또는 의료재료비를 청구할 수 없어 손실을 감수하며 진행하는 실정이다. 동시다발 질환을 가진 여성들이 수술을 받을 경우에는 포괄수가제에 포함되지 않도록 예외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과거에는 수술용 가위·나이프로 절개하고 실을 이용해 지혈했다. 수술 중 많은 출혈은 빈혈 발생과 수혈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전기·초음파 에너지 기구 등을 이용해 절제와 지혈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덕분에 수술 중 출혈량과 수술 부위의 염증, 수술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실을 사용하지 않아 수술 부위에 남는 이물질을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산부인과에서는 아쉽게도 발전된 에너지 기구의 사용이 여의치 않다. 따라서 부인과 수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궁·난소 관련 수술에서도 첨단 의료기기·제품을 사용할 수 있게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대부분의 남성 환자들은 이런 기구로 수술받는데 여성은 포괄수가제 때문에 암환자가 아니면 이런 기구로 수술받지 못하는 현실은 매우 불합리하고 불평등하다.

자궁·난소 수술 후 유착이 발생하면 가임기 여성의 경우 불임·가성낭종·장폐색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장폐색이 발생하면 콧줄로 불리는 위배액관을 코로 삽입하고 금식 및 수액요법을 받게 된다. 호흡도 불편해 환자들에게 큰 고통을 준다. 유착방지제를 사용하면 이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산부인과에서는 포괄수가제로 인해 사용을 제한받고 있다. 반면 산부인과 이외의 다른 임상과 수술에서는 이를 사용하는 데 아무런 걸림돌도 없다.

현행 포괄수가제는 의료기술과 치료재료의 발전을 반영하지 못한 ‘구닥다리 포괄수가제’ ‘저가 포괄수가제’다. 여성의 건강을 위협하고 많은 산부인과 병·의원의 폐업, 의료 인프라의 부실화를 초래했다. 세계 최저 출산율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도 많은 임산부들은 차로 1시간 이상 떨어진 도시의 산과 병원에 다녀야 한다. 우리나라 여성들도 양질의 치료기술과 의료제품의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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