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이후 순조롭게 풀릴 것 같던 북핵 문제가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지난 7월 방북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이번에는 진전을 이룰 것으로 기대되던 중 돌연 방북이 취소된 것이다. 북한이 종전선언을 강하게 요구했다든지, 줄 것이 없으면 굳이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든지 하는 뒷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사실 북미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비핵화에 실질적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고 평가한 전문가는 별로 없었으니 전혀 의외의 상황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북핵 문제의 해결을 통해 대북제재가 완화되고 남북한 간의 협력이 재개될 수 있기를 바라는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진전이 이뤄질 수 있을까. 미국이나 우리나라가 원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면 된다. 여덟 차례의 유엔 대북제재 결의도 제재의 목적이 북한의 핵·미사일 포기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에 비해 북한이 원하는 것은 해석과 추측이 필요하다. 그동안 북한은 ‘군사적 위협 해소’나 ‘체제안전 보장’과 같은 희망사항을 언급해왔고 센토사 북미 선언에는 ‘새로운 미북 관계’의 수립이 포함돼 있다. 실제로 북한이 시급히 원하는 것은 국제 제재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을 갖는다. 그런데 현시점에서 북한은 종전선언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듯하다. 미국은 종전선언을 반대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북한이 구체적 비핵화 조치를 시작해야 줄 수 있는 보상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이렇게 누가 무엇을 먼저 하느냐가 관건이 되고 있다면 13년 전의 9·19공동성명 같은 합의가 필요하다는 뜻이 된다. 2년 이상의 협상으로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조치와 여타 국가들의 상응 조치를 합의한 것이 9·19공동성명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비핵화만 되면 많은 보상이 있을 것이라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추어올리고 있지만 북한은 이런 말만을 믿고 먼저 비핵화를 할 뜻이 없는 것 같다. 서로 믿지 못하는 가운데 ‘완전한 비핵화’를 실행하려면 협상을 통해 단계별 조치에 합의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협상의 재개에 대한 걸림돌은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조급증과 북한의 의도 자체를 의심하는 회의론이다. 조급증은 미국과 북한 모두에 있는 것 같다. 미국은 북한의 장거리 핵능력 보유 가능성과 정치 일정 때문에, 북한은 제재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절박함 때문에 그런 듯하다. 북한이 결국 핵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보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북한이 실제로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 제재 완화만을 추구할 가능성을 우려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비핵화는 과학이기 때문이다. 핵물질은 독특한 과학적 특성 때문에 숨기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에서 오래전에 있었던 핵물질 실험의 흔적을 발견돼 해명에 애를 먹은 적이 있다. 9·19공동성명 이행이 ‘신고’ 단계를 넘기지 못한 것도 핵시설과 장치를 검사하면 신고내용이 정확한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신고가 단순히 비핵화의 첫 단계일 뿐 아니라 처음부터 투명성을 강요당하는 셈이다. 1993년 북핵 문제의 시작 자체가 북한의 부정확한 신고에 대한 IAEA의 해명 요구에서 비롯됐다.
현재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6자회담과 유사한 핵협상의 재개를 제안할 수 있다고 본다. 반드시 6개국 전체가 참여하지 않더라도 미북을 중심으로 협상을 벌여 필요한 조치들의 내용과 순서에 합의할 수 있다. 서로 해석이 다를 수 있는 ‘완전한 비핵화’나 ‘체제안전 보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필요로하는지도 분명해질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미 간의 정치적 화해 제스처와 군사적 대립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회의론자들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때다. ‘비핵화 완료’의 도장을 찍어주는 것은 정치인이 아닌 과학자니까, 일단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믿고 상호 조치에 관한 협상에 들어가도 손해 볼 것이 없다. 뜨거운 정치보다 냉정한 과학을 통한 북핵 해결을 시도할 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