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진엽 콜렉티브A 예술감독 겸 무용수/권욱기자
안무를 한다는 것은 경험과 사유의 설계도면을 그려내는 일이다. 크레파스로 상상 속의 멋진 집을 그려내던 어린아이들이 모두 건축가가 되는 것이 아니듯 몸의 언어를 모국어로 익히고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경지에 이른 무용수들 중에서도 경험과 사유를 버무린 자기만의 언어 세계를 구축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차진엽(40)은 직접 쓰고 그리는 즐거움을 일찌감치 깨달은 무용수다. 물론 ‘일찍’ 깨달았다고 모두 대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차진엽의 진가는 깊이와 확장에서 나온다.
최근 과천 서울발레시어터 연습실에서 만난 차진엽은 단원들과 함께 공연 준비 막바지 작업에 분주했다. 군포프라임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서울발레시어터가 공동으로 선보이는 창작 발레 ‘빨간구두:영원의 춤’에서 차진엽은 안무를 맡았다. 현대무용수, LDP무용단 창립 멤버, 프로젝트 그룹 콜렉티브A 예술감독, 움직임 지도자 등 차진엽을 수식하는 숱한 단어 중 이날은 발레 안무가가 선두에서 고개를 내미는 날이다. 직접 동작을 보여주며 군무 동작을 다듬는 차진엽의 몸짓에 단원들이 숨을 죽인다.
“시작은 발레였어요. 춤이 좋아서 무용수가 되기로 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갑자기 권태기가 왔어요. 핑크색 튀튀, 토슈즈,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군무와 시선 처리까지 모든 게 갑갑한 거예요. 1학년 때 부전공으로 배운 현대무용이 생각났어요. 푼수 같고 자유분방한 저에게 딱 맞는 옷 같았어요. 그래서 과감하게 전과했죠. 그때 결심하지 않았으면 춤을 추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지금은 발레가 정말 좋아요. 발레에 현대무용을 접목할 수 있어 더 재미있고요.”
토슈즈를 벗어던지고 현대무용의 세계에 맨발로 들어선 열여덟 살, 그 시절과 다를 바 없이 차진엽은 경계를 허물고 넘어서기를 즐긴다. 발레뿐만이 아니다. 한국무용부터 세계 각지의 전통춤까지 과감하게 손을 뻗어 몸 안 가득 받아들인다. 대중가요 뮤직비디오에 영화·연극·뮤지컬까지 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 2012년 그가 창단한 프로젝트 그룹 콜렉티브A는 확장을 위한 발판이다. 댄스컴퍼니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은 이유는 춤이라는 경계 안에 작업의 범위를 가두고 싶지 않아서다. A는 순수와 비순수의 경계를 지운 예술(art)이자 모든 예술(all kind of art)을 의미한다.
그를 움직이는 동력은 호기심이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재능이 몸 안 깊숙이 남아 있을까 궁금해서” 차진엽은 늘 경계를 넘는다.
“내가 지닌 가능성을 확장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해보지 않으면 못하는지 잘하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걸 하나하나 검증해보고 싶은 거죠. 어떤 사람들은 제가 결혼을 하지 않고 춤만 보고 산다고 춤과 결혼했다고 해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춤으로 고통받으며 살고 싶지는 않거든요. 나를 갉아먹으며 창작하는 대신 내 몸에 무언가를 더해가며 계속 창작하고 춤을 출 방법을 나름대로 찾아가고 있는 거죠.”
차진엽 콜렉티브A 예술감독 겸 무용수/권욱기자
차진엽과 30분만 대화를 나눠도 감지되는 것이 있다. 모든 답변이 ‘나’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의 춤과 삶도 그렇다. 차진엽의 춤은 자기 자신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늘 출발점은 ‘나에 대한 호기심’이다. 자기가 지은 춤을 직접 추는 것도 내가 적어 내려간 나를 제 몸으로 말할 때, 의식과 몸이 일치할 때 느끼는 충만함 때문이다.
“무대에 설 때만큼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없어요. 숨결·촉감·움직임까지 모든 것에 귀 기울이게 되죠. 그때 가장 나다움을 즐겨요. 춤을 추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무대에 설 때죠. 내가 안무한 작품을 내 몸으로 출 때는 더 집중돼요. 한 톨도 흘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한 치의 타협도 없죠. 거기서 희열을 느껴요.”
첫 안무는 스물네 살 때였다. 제목은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시인의 동명 시를 모티브로 나를 억압하는 세상의 부조리와 부당함을 고발하는 작품이었다. 치기 어린 부분도 있지만 그 나름의 덜 숙성된, 그 시절의 이야기와 몸짓이 차진엽은 ‘지금도 같은 맥락 안에서 계속 흘러가고 있는 나의 첫 페이지라는 사실’을 늘 떠올린다. 어린 안무가들은 대부분 수다쟁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비움과 빗댐의 미를 아는 시인이 된다. 차진엽도 그렇다. 일전에 차진엽과 공동 기획작품을 선보였던 마임 1세대 김성두는 차진엽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북 페이지에 ‘포에틱 무브먼트’라는 단어를 적어놓았다. 무용수도, 안무가도 아닌 ‘시적 움직임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표현에 차진엽은 무릎을 쳤다.
“제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머리보다 몸으로 먼저 감각하기 바라요. 머리로 먼저 이해하려고 하면 안무가가 심어놓은 의도를 받아들이는 수준에 그치지만 몸이 먼저 느끼고 그 느낌이 머리로 전달되면 마치 화학반응처럼 관객의 경험과 생각이 섞이거든요. 그때 새로운 해석이 나오는 거죠. 제가 쓴 몸의 언어는 소설이나 수필보다는 시였으면 해요. 그렇지만 의미 없는 모호한 몸짓은 지양합니다.”
인간이 성장할수록 발 딛고 선 세계가 넓어지듯 차진엽이 춤의 주제로 삼는 세계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그는 “요즘 들어 바뀐 게 있다면 나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심리상태·경험보다는 내가 바라보는 세상으로 주제가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지난해 선보인 ‘미인:바디 투 바디’는 강요와 속박에 내몰렸던 여성의 몸을 탐구하는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국내를 대표하는 안무가로 성장했고 세계 무대에서 손꼽히는 춤꾼이 됐다. 댄스 경연 프로그램 ‘댄싱9’에서 화려한 외모에 능력까지 겸비한 심사위원으로 대중에 적잖이 이름을 알렸고 2014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안무 총감독, 2018평창동계올림픽 안무감독 등 굵직한 행사에서도 활약했다.
차진엽 콜렉티브A 예술감독 겸 무용수/권욱기자
그러나 꿈은 멈추지 않는다. 우선 늘 카메라 앞에 섰던 그가 카메라 뒤에 서서 뷰파인더로 타인의 몸짓을 들여다볼 궁리를 하고 있다. “댄스필름은 이미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고 저 역시 관련 공부를 하고 작품을 만들어보기도 했어요. 이제는 안무감독이나 출연에 그치지 않고 디렉팅 작업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진지하게, 깊이 있게 공부해볼 생각이에요.”
또 한 가지 꿈은 60대가 돼 무대에 올라도 아름다울 몸을 만드는 것이다. 몸을 훈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신적 성숙이다. 정신이 누추해지면 몸이라는 외피로도 감춰지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은 영혼이지 기교가 아니다”라는 이사도라 덩컨의 말처럼.
“건축은 인간의 몸이고 인간이 창조하는 모든 것은 춤이죠. 나를 재료로 하는 이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온 무용수예요. 60대의 피나 바우슈가 무대에 섰을 때 관객들이 감동받은 것은 그녀의 삶이거든요. 몸에 대한 고민과 수련 그리고 잘 사는 게 핵심이에요.”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She is
△1978년 서울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졸업 △2001년 LDP무용단 창단 △2007년 영국 런던컨템퍼러리댄스스쿨 석사 △2009 무용예술상 연기상 △2012 한국춤비평가상 베스트작품상 △2012 춤평론가상 춤연기상△2012년~ 콜렉티브A 예술감독 △2014인천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 개·폐회식 안무 총감독 △2014 문화체육관광부장관표창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17 춤평론가상 작품상 △2018평창동계올림픽대회 개·폐회식 안무감독 △2018 한국뮤지컬어워즈 안무상 △네덜란드 랜덤 컬리전(Random Collision) 비상주안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