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시민들이 자국 화폐 액면절하로 인해 못 쓰게 된 100 볼리바르로 탑을 만들어 시위하고 있다. /블룸버그
최근 김밥에서 시금치가 사라졌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8월 시금치의 가격이 전월 대비 128% 올랐기 때문인데 지난 여름 폭염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동시에 양배추와 배추의 가격이 각각 85%, 71% 상승하기도 했죠.
이런 일이 매일 일어나는 나라가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보면 인터넷 쇼핑을 하다가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잠들었는데 다음 날 깨어 보니 가격이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올라 있는 그런 상황인 거죠.
물가가 일 년에 1만 배 오르는 나라가 있습니다. 남아메리카 최북단 베네수엘라 이야기입니다.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12월까지 베네수엘라 물가가 100만 퍼센트까지 오를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지난해만 해도 IMF가 예측했던 2018년 물가 상승률이 1만 3,000 퍼센트였는데 큰 차이로 수치를 수정했죠.
이런 일을 경제학에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초 인플레이션)’으로 설명합니다. 정부에서 과도하게 돈을 찍어내면서 한달 새 물가가 50% 이상씩 상승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는 거죠.
베네수엘라의 화폐 단위는 볼리바르(Bolivar)입니다. 지난해만 해도 화폐 최고 단위는 100볼리바르였지만 올해는 10만 볼리바르가 됐습니다. 하지만 통용되는 화폐 단위를 늘려도, 돈을 찍어내도 물가 상승분을 따라잡기는커녕 물가가 폭등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한 달 최저임금은 500만 볼리바르 입니다. 조만간 최저임금 인상이 큰 폭으로 있을 예정이고요. 지난달 정부에서 밝힌 500만 볼리바르의 값어치는 미화 40달러 수준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국민들이 물건들을 사고파는 암시장에서는 500만 볼리바르는 미화 1달러도 안 되지요. 그렇다 보니 한 달 동안 일을 해도 돼지고기 1kg(4∼5인분)도 사기 힘들다는 게 현실이죠. 지난해 블룸버그가 조사한 커피 가격이 200만 볼리바르였으니 한 달 동안 일해서 번 돈으로는 커피 두 잔 사 먹기도 힘든 지경이 됐죠.
주식인 빵에 들어가는 옥수수가루를 구하기 어렵다보니 국민 10명 중 9명은 2015년보다 적게 먹고 평균적으로 체중이 무려 11㎏나 줄었다고 합니다. 국민들은 이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이름에 빗대 ‘마두로 다이어트’라고 자조하고 있죠.
식량도 문제지만 이들의 목숨이 위협받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식량을 구하기도 힘든데 의약품은 더욱 구하기가 어렵겠죠.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가장 큰 걱정은 혹시라도 병이 생기면 아무리 작은 병이라도 손 쓸 수 없게 된다는 겁니다. 목숨이 위협받는 ‘살인 물가’ 상황이죠. 사회 불안 요소가 커지다 보니 수도 카라카스의 살인율은 세계 1위로 올라섰습니다. 여러 이유로 인해 베네수엘라 인구의 10%에 가까운 230만명이 타국으로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공통점은 있습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주변국의 냉대와 폭력뿐이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 탈출을 택했다는 겁니다.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 있는 한 주유소에서 직원이 주유 후에 받은 돈을 세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상당수 상인들은 현금 보관 비용이 훨씬 크다는 이유로 지폐를 받지 않고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게 하고 있다. /블룸버그
베네수엘라에서는 매일 같이 물가 상승이 큰 폭으로 있다 보니 화폐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현금을 가져가면 상인들은 돈을 받지 않고 신용카드로 긁으라고 합니다. 현금 보관 비용이 훨씬 크다는 거죠. 주차비 같은 건 에너지 바나 초콜릿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쓸모없는 지폐보다는 요깃거리가 될 만한 게 낫다는 생각이죠. 못 쓰게 된 지폐를 엮어 가방이나 지갑 등을 만드는 상인들의 모습도 진풍경입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장래희망 1위인 건물주도 여기서는 안타까운 처지입니다. 한달만 지나면 물가는 크게 올라있는데 월세는 이를 못 따라가죠. 한 달 전 월세로는 현재 암시장에서는 우유 한 통 사는 것도 어렵다고 합니다.
이 모든 비극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건 베네수엘라의 석유 매장량이 전 세계 1위라는 점 때문입니다. 수출의 96%를 석유가 차지할 정도였죠. 하지만 지금은 넘쳐나는 석유를 갖고도 끼니를 고민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두로 대통령의 실책도 크지만 문제의 원인을 짚어내기 위해서는 전임인 고(故)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따라가야 합니다. 차베스 전 대통령은 1999년 처음 정권을 잡고 2013년 사망하기까지 빈민 정책에 가장 큰 힘을 썼습니다. 빈민층 200만 가구에 무상으로 집을 지어주고 화장지, 밀가루, 식용유 등 필수재의 가격을 통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오일 머니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무리한 빈민정책으로 인해 국영석유기업 PDVSA는 망가져 갔고 매출의 상당 부분이 빈민 정책에 쓰였습니다. PDVSA의 기존 인력은 전문성 없는 낙하산 인사들이 대신 했죠.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생산 가능한 석유량은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또 필수재 가격을 통제하다 보니 이윤이 남지 않은 기업은 문을 닫았고 결국 수입에 의존하게 됐습니다.
여기에 외화는 무조건 정부를 통해서 고정비율로 환전하도록 하다보니 실제 환율을 반영하지 못해 달러에 대한 수요는 암시장으로 몰렸습니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떨어지고 자국 화폐만 시장에 넘쳐나 화폐 가치가 급격히 떨어졌죠. 이러한 통제 정책과 극단적인 포퓰리즘이 베네수엘라를 지금의 상황으로 끌고 갔죠.
지난 21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한 남자가 화폐개혁에 따라 새로 유통되기 시작한 신권을 보여주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초(超)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한 지 이틀째인 이날 야권이 총파업을 소집한 가운데 시민들은 액면가를 10만 대 1로 절하한 새 화폐로 무엇을 사야할지 난감해하는 등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연합뉴스
견디다 못한 마두로 정권은 지난 8월20일 10만 볼리바르를 1볼리바르로 액면절하했습니다. 또 다른 궁여지책으로 지난 2월에는 매장된 원유를 담보로 암호화폐 페트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실물을 기반으로 떨어진 화폐 가치를 높이겠다는 거죠. 정부에서는 부동산 거래를 비롯해 세금, 이자 납부까지 페트로를 통해 하도록 강제하며 힘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효과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미국에서는 페트로 거래 금지를 선언했기 때문이죠.
결국 서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이 서민은 물론 나라 전체를 빈곤에 시달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죠. 정부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만 펼 경우 시장의 자율성을 얼마나 망가뜨릴 수 있는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번 경제 원리가 무너지고 나면 회복하기가 정말 힘들다는 사실도 말이죠. 성급한 화폐 개혁보다는 국가 안팎으로 신뢰를 줄 수 있는 정부의 행보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베네수엘라의 물가는 얼마나 올라갔을까요.
/정혜진기자 made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