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데뷔해 세계적 거장 반열에 오른 현대미술가 윤석남(79)이 신작 자화상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 서울노인복지센터는 오는 10월24~27일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서울노인영화제’를 연다. 이 행사는 60세 이상 연출가를 대상으로 한 국내 유일의 노인영화제다. 지난 2008년 첫 개최 이후 올해로 벌써 11회째를 맞았지만 ‘노인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던 초창기만 해도 영화제 사무국은 출품작 50편을 채우기가 버거웠다. 접수되는 작품 수가 워낙 적어 수준 이하의 완성도만 아니라면 영화제 기간에 상영 기회가 주어지는 ‘본선 진출’은 따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사무국 내부에서조차 영화제가 길게 명맥을 이어갈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랬던 영화제가 최근 몇 년 새 반전의 계기를 맞았다. 평균 수명이 확 늘고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 노년층이 많아지면서 출품작 수가 껑충 뛰어오른 것이다. 영화제의 한 관계자는 “2015년 150편에 육박한 출품작이 올해 처음으로 200편을 돌파했다”며 “8대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본선에 진출해 관객에게 작품을 선보이는 감독은 ‘프로 연출가’로 데뷔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멀게만 느껴졌던 ‘100세 시대’가 눈앞에 열리면서 영화·문학·미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제2의 인생을 꽃피우는 중장년·노인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과거처럼 문화센터의 수강생으로 등록하거나 단순한 취미활동에 그치던 모습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창작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문단 등단이나 전시회 개최 등을 통해 프로 예술가로 이름을 떨치는 경우도 생겨나면서 문화·예술계를 한층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늦깎이 예술가’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는 문단이다.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송호근(62) 포스텍(포항공과대)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는 지난해 4월 구한말의 혼란상을 그린 장편소설 ‘강화도’를 출간하며 작가로 데뷔했다. 이달 초 포스텍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20년 넘게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송 작가는 차갑고 냉철한 학문적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구하고자 뒤늦게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한참 늦은 데뷔의 안타까움을 해소하겠다는 듯 1년도 채 안 된 올해 2월 두 번째 장편 ‘다시, 빛 속으로’를 발표하며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두 책을 출간한 출판사 나남 관계자는 “송 작가처럼 다른 분야에서 쌓은 인지도가 출중한 경우 늦깎이 데뷔라도 초짜 신인보다는 유리한 측면이 있다”며 “역사소설 시장이 그리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송 작가의 두 작품은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호응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등 내놓은 작품마다 대박을 터뜨리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소설가 정유정(52)도 사실은 마흔 넘어 문단에 입문한 늦깎이다. 병원 간호사,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직원 등으로 10년 이상 직장생활을 한 정 작가는 41세에 선보인 데뷔작(‘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이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외에도 40대 후반에 첫 소설 ‘미스 함무라비’를 출간한 문유석(49)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2010년 이후 장편소설만 8권을 쓴 도진기(50) 변호사 등 우리 문학계에 새로운 피를 수혈 중인 ‘늦깎이 신인’은 차고 넘친다.
남보다 늦은 나이에 데뷔한 예술가들의 약진은 미술계에서도 돋보인다. 브라질 상파울루에 살다가 지난해 귀국한 이찬재(76)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보내는 그림 편지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일약 작가로 발돋움했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한 할아버지는 지난 6~7월 주한 브라질대사관에 이어 최근에는 경기 파주시의 아이레벨 트라움벨트에서 ‘너를 위한 편지’ 기획전을 열기도 했다. 현재 인스타그램 팔로어만도 35만명에 달하는 할아버지는 외국에서도 ‘찬 할아버지(Grandpa Chan)’라는 애칭으로 유명해지면서 영국 BBC방송과 브라질 인기 프로그램에 소개됐다. 화가 윤석남(79)은 가정주부로 살다가 마흔에 늦깎이로 데뷔해 40년 가까이 조각·설치·회화 등을 선보이고 있다. 평범한 중년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깨우침이 작품에 그대로 투영됐고 ‘인생 이모작’에 성공해 한국 1세대 페미니즘 작가로 뿌리내렸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중장년 이상 세대가 문화·예술계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는 것은 평균 수명의 연장으로 ‘제2의 인생설계’가 중요한 화두로 부상하면서 예술작품을 통한 자아실현을 꿈꾸는 이들이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김원섭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늦은 나이에 프로 예술가로 데뷔하는 사례들은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싶어하는 ‘활동적 노년(active aging)’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전문 예술가로 데뷔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와 관련한 취미생활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중장년 이상 세대도 늘어나는 추세다. 실제로 유통가에 따르면 현대백화점 문화센터의 미술 강좌에 등록한 50대 이상 수강생의 전년 대비 증가율은 △2016년 4.7% △2017년 8.8% △2018년 12.9% 등으로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나윤석·조상인·김현진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