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78>배운성 '대가족']옹기종기 모인 17명의 대가족...애틋한 그리움을 채우다

주인집 한옥 배경으로 한 가족 초상화
그림 맨 구석에 화가 자신도 그려넣어
라파엘로 작품 '아테네학당'과 닮은꼴
열다섯살 무렵부터 남의 집 더부살이
부자 주인 덕에 공부하고 독일서 유학
한국인 최초로 유럽화단서 활발한 활동
한국전쟁때 월북 제대로된 평가못받아

배운성 ‘가족도’ 140x200cm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졌다. 근대기 대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사료라 등록문화재 제534호로 지정됐다. 개인이 소장한 작품으로 지난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배운성’전에도 출품된 대표작이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추석까지 열흘도 채 안 남았다. 고향 가는 차편 준비는 이미 끝냈을 테니 이제 곧 만날 가족에 대한 그리움만 한껏 부풀리면 될 때다. 명절 앞두고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고향 생각, 식구 생각은 경험으로 보건대 요맘때가 최고조다. 막상 만나면 그 기분이 기대했던 맘 같지 않고, 심지어 별것 아닌 일로 투덕투덕 다투기도 한다. 그게 ‘식구’이니 말이다.

여기 할머니부터 돌쟁이 막내 손주까지 3대 이상 됨직한 대가족이 빙 둘러 모였다. 무려 17명이 옹기종기 앉고 섰는데도 좁아 보이지 않는 이 한옥은 1900년대 서울 갑부로 유명했던 백인기의 집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미술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대가족 초상화이며 당시의 옷차림과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사료라 등록문화재 제534호로 지정된 작품이다. 화려한 의자에 앉아 손주를 안은 할머니와 그 뒤에선 부부는 뻣뻣한 것이 꼭 돌날 기념사진에서 떼어낸 듯하다. 할머니 쪽으로 어깨를 댄 노란 옷의 소년은 얼굴이 창백하고 기운 없어 보이는 게 조금 아파 보이기도 한다. 딴짓 피우는 아이 둘을 지나 오른편에 선 젊은 여인은 자랑이라도 하듯 찻잔을 손에 든 모습이 특이하다. 널찍한 대청마루 뒤쪽으로 난 창 너머에는 여유로운 자연과 풍족한 장독대가 보인다. 인물의 개성이 뚜렷하고 사진처럼 생생하게 묘사된 것으로 미루어 실존 인물들인 게 확실하다. 아마도 백인기의 가족일 것이다.

배운성 ‘모자를 쓴 자화상’ 1930년대, 개인 소장. /사진출처=국립현대미술관

그런데 한 사람, 그림 맨 왼쪽의 흰 두루마기 사내가 눈에 띈다. 대체로 정면을 응시하는 다른 어른들과 달리 그는 약간 비스듬히 안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배운성(1900~1978)이다. 기름한 홑꺼풀 눈매에 둥근 코와 도톰한 입술이 분명 그다. 전하는 그의 자화상 작품들과 일치하는 얼굴이다. 자화상은 거의 대부분 약간 돌린 옆얼굴이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같은 극히 이례적인 작품이 있기는 하나, 주로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며 그려내는 그림의 특성상 옆얼굴이 일반적이다. 가족은 아니었으나 한솥밥 먹는 식구로서 자신을 그림 구석에 세워 넣은 배운성의 표정은 조금 상기됐다. 다림질 잘한 두루마기 밑으로 서양식 가죽구두를 신었다. 젊고 생기있는 그 모습이 꼭 ‘아테네학당’ 속에 자신을 그려넣은 산치오 라파엘로(1483~1520)와 닮았다. 1511년 교황의 명을 받아 바티칸 궁의 벽화로 완성된 이 작품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에 두고 피타고라스, 프톨레마이오스 등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있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의 맨 오른쪽 구석에 자신을 그려넣었다. 역시나 비스듬한 옆얼굴이다. 검은 모자를 쓴 가장 잘 생긴 얼굴로 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그린 초상화에 자신을 ‘살짝’ 그려넣는 것은 화가의 특권이자 묘미였다. 스페인 궁정화가로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도 그랬다. 그 유명한 ‘라스메니나스(Las Meninas)’, 즉 ‘시녀들’로 번역되는 그림에서 벨라스케스는 가운데 선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자신을 캔버스 뒤쪽에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양손에 붓과 팔레트를 들고 있지만 자세나 외모는 늠름한 기사 같다. 어린 공주를 지켜보는 국왕 부부는 화가의 뒤쪽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비친 모습으로 등장한다. 권력과 신분의 차이가 엄청났음에도 화가와 왕은, 공주와 그녀를 보필하는 시녀들은 같은 화폭에 공존한다. 화가의 지향점이 ‘평등’이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배운성 ‘줄다리기’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그렇게 객식구 배운성은 주인댁 가족사진에 끼어 들었다. 한 가지 더 인상적인 것은 그림의 가운데서 구심점이 된 할머니다. 배운성이 1930년대에 두 점이나 그려놓은 자신의 ‘어머니 초상’과 상당히 흡사하다. 게다가 찻잔 들고 선 여성이 할머니와 꽤나 닮았다. 어쩌면 화가는 두고 온 여동생을 상상하며 여인을 그린 것일지도 모른다.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여유있는 삶을 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담아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림 아래쪽으로, 사람들보다 더 깊은 눈매를 가진 미끈한 개다. 토종은 아닌, 외국산으로 보이는 그 낯선 개에게 화가가 투영한 또 다른 자아가 엿보인다.

배운성은 ‘최고’,‘최대’와 ‘최초’를 잘 챙기는 우리가 잊고 지낸 화가 중 하나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유럽에서 유학하고 현지 화단에서 이름을 날렸다. 1927년에는 당시 유럽 화단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대표적 가을 전시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에 조선인 최초로 출품해 수상했다. 피카소와 샤갈, 모딜리아니 등과 나란히 그림을 걸었던 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국내 신문과 잡지에서도 그의 활약상을 전하며 ‘당대 최고의 국제화가’로 자랑스러워 했다.
배운성 ‘제기차기’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배운성은 1900년 7월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태어났다. 1908년에 인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가세가 기울어 중퇴했다. 다닐 수 없게 된 학교를 떠나지 못하고 경성중학교 급사로 일하다 열다섯 살 무렵부터 남의 집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당시 그 동네 제일가는 부자이자 서울 갑부로 유명했던 백인기 댁에 일을 해주면서 공부도 하는 서생(書生)으로 들어갔다.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이 또래였기에 말벗 겸 공부 친구였고, 몸종이었다. 1919년에 백명곤이 일본으로 유학갈 때도 배운성이 따라 갔고 뒤이어 1922년 독일 유학길에도 함께였다. 그러나 백명곤이 병에 걸려 유학 중간에 귀국하게 됐고 “돌아갈 여비를 보내주지 않아” 배운성은 독일에 남게 됐다. 그게 꼭 여비 때문만이었을까. 식민지 머슴살이를 하던 그가 외국 문물을 접하면서 어느새 개화기 지식인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신분과 재산과 권력의 틀에 갇히지 않고 그저 맨몸 맨손으로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독일에 남기를, 스스로 택했을지도 모른다. 배운성 연구가인 김복기 아트인컬처 대표(경기대 교수)는 “가난했던 배운성이 와세다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것이나, 몸종 역할과 유럽 유학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다. 경제학 전공은 주인의 아들 백명곤의 유학코스가 아니었을까 추측은 가능하다”면서 “여러 자료에 따르면 유럽에 간 배운성은 경제학 전공을 목적으로 했지만 마르세이유 박물관의 대형 그림들에 감동을 받았고 베를린에서 우연히 한 화가를 사귀면서 미술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배운성은 1925년 베를린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해 본격 수업을 받는다. 그 시절 베를린은 야수파와 표현주의가 꿈틀댔으며 다다이즘의 거점도시였다. 하지만 배운성은 전위적인 예술보다 고전적인 서양화풍을 선호했고 한국적 풍물을 즐겨 그렸다. 그런 이국적 소재는 유럽인들을 열광케 하기 충분했다. 그 시절 유럽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화가들은 ‘에꼴 드 파리’라 불렸는데 그들 중 하나였던 마르크 샤갈도 러시아 쪽 고향의 민속적·종교적 풍물을 그려 독특함으로 주목받았다. 지난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배운성’전을 기획한 류지연 학예연구관은 “배운성이 1935년 개인전을 연 곳이 함부르크 민속박물관이었다는 점, 미술관이 아닌 민속박물관이라는 점은 이채롭기에 추가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배운성은 점잖고 친절한 성격 덕에 예술가들과 친분을 넓혔고 명망 있는 인사들의 초상화도 자주 의뢰받았다. 1937년 나드롱카 폰 브레데라는 여인과 결혼해 그해 10월 파리로 옮겨갔다. 그의 1938년작 초상화 ‘화가의 아내’를 보건대 부인은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미인형이었다. 그 아내와의 사이에 딸이 있었고 1960년대 초반까지도 동독에 살았다고 전하나 지금은 그들의 행방을 아는 이가 없다. 그렇게 배운성은 화가로 이름 날렸고 이국땅에서 반일운동에 참여했다. 이미륵 등 민족주의 유학생들과 교류했고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베를린 올림픽 때는 국내 신문사의 현지 특파원을 맡는 등 ‘조선인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유럽에 전쟁의 기운이 드리우자 애지중지하던 그림마저 둔 채 급히 귀국길에 오른다. 돌아온 조국에서 다양하게 미술 활동을 펼치지만 6·25전쟁이 터졌을 때 북으로 갔고 남한의 역사에서 지워졌다. 유럽에 두고 온 독일인 아내를 잊고 한국에서 재혼 한 젊은 아내 이정수 씨가 좌익 성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양미술대학을 세우고 예술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 배운성은 아들 경운·경휘와 딸 경임을 두고 1978년 세상을 떠났다. 사라진 배운성의 그림은 불문학자인 전창곤 대전 프랑스문화원장이 파리의 골동품상에서 찾아내 48점을 일괄구입한 덕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족도’ 또한 그의 소장 작품이며,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도 그 덕에 성사됐다.

온 가족이 모이는 한가위가 다가온다. 화목보다 더 큰 화합, 행복만큼 소중한 평화를 꿈꾸게 하는 시절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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