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채 ‘축전(祝典) 91-8’. 1991년작, 128.5×151.5㎝ 크기 캔버스에 그린 유화. 추석을 앞둔 때라 밤하늘처럼 어두운 바탕을 꽉 채운 원이 휘영청 보름달로 보인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그 달 참 둥글고 크다. 턱 괴고 내다보는 창틀을 꽉 채우고도 넘칠 기세다. 조선 후기 문신인 대산 김매순(1776~1840)이 문집 ‘대산초고’에서 당시 서울의 풍속 80여 가지를 추려 ‘열양세시기’를 쓰면서 “더도 덜도 말고 늘 한가위 같기만 바란다”고 기록한, 딱 그 말 같은 둥근 달이다.
휘영청 희맑은 동그라미 자리에 이리저리 물결이 이듯 붓질 오간 자리 선명한 것이 도공이 손으로 훑은 커다란 백자 달항아리를 보는 듯하다. 눈 같은 설(雪)백색이요, 젖 같은 유(乳)백색이라 불린 조선 백자처럼 이 달 또한 희지도 누렇지도 푸르지만도 않은 오묘한 색감을 풍겨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밤하늘처럼 새카만 줄만 알았던 원 주변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원의 왼편은 진남색이고 오른쪽은 진자주색 곡면(曲面)이 드리웠다. 저 희고 둥근 것이 달이라면 그 보라빛은 달 그림자쯤 되려나. 둥근 흰 자리는 물감을 덧바른 흔적이, 주변의 어두운 자리는 쌓아올린 물감을 긁어낸 흔적이 대구를 이룬다.
이 그림은 현대 한국 추상화단의 거장 류경채(1920~1995)의 대표작 ‘축전(祝典) 91-8’이다. 기실, 작가가 콕 찍어 달을 그린 것은 아니다. 다만 시절이 추석 목전이니 보는 사람 마음이, 눈이 그리 본 것 뿐이다. 언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시시각각 달리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추상미술이었고 화가는 그런 추상미술에 한평생을 바쳤다. 보는 이의 눈을 현혹시킨 ‘창틀’도 사실은 그림의 액자다. 원래 작품은 어두운 바탕을 차지한 둥근 원으로 이뤄졌지만 액자를 같이 놓고 보니 그럴싸한 창 너머 보름달이 됐더랬다. 달이면 어떻고 달이 아니면 어떻겠나. 내 맘이 저렇게 여유롭고 충만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류경채의 저 둥근 달은 수채화 같은 드뷔시의 ‘달빛’보다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14번(작품번호27-2) ‘월광’에 훨씬 더 가깝다. 자유로우면서도 흐트러지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화가의 성품도 그랬던 것은 활동상이 말해준다. 류경채는 1940년 당시 유일의 전국 규모 미술 공모전이자 가장 권위 있는 미술제였던 조선미술대전(약칭 ‘선전’)에 입선하면서 데뷔했다. 이후 해방 맞은 정부가 마련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았고 30회로 막을 내린 국전을 끝까지 지키고 지지한 작가다.
류경채의 1949년작 ‘폐림지 근방’. 제1회 국전(國展)에서 최고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1949년에, 광복을 되찾은 대한민국이 나라 이름을 걸고 개최한 첫 미술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그림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의 기획전 ‘내가 사랑한 미술관’에서 직접 볼 수 있는 ‘폐림지 근방’이다. 벌거벗은 살색 같은 누런 흙바닥에서, 핏물이 스민 것만 같은 적갈색 흙을 뚫고 자라난 나무들을 그리고 있다. 가지가 꺾이고 휘었건만 죽지 않고 초록을 버텨낸 나무들이다. 화가는 지금의 왕십리 한양대 근처의 야산을 보고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양분 한 톨, 물 한 방울 없는 곳에서 자라나는 생명에서 그는 자연의 신비를 깨달았다. 사실적 화풍이 주류였고 일제 강점기에 등장한 ‘조선 향토색’이 지배적이던 시절이라 첫 국전을 심사하던 당시 심사위원들이 “위험한 그림”이라 했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작품은 일제 침략으로 황폐한 대지에서 피어 오르는 우리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했다는 찬사와 함께 영예를 안았다. 그런데 이후 축하기념 순회전이 열리던 중에 6·25 전쟁이 터졌다. 전쟁통에 하필 이 그림이 없어졌다. 우여곡절 끝에도 하늘의 축복이 있었던지 그림이 발견됐다. 어느 집 장독대 덮개로 전락한 신세였다. 정신없이 그림을 되찾아 온 작가가 덧칠하고 손봐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림 한 점이, 온갖 시련에도 마침내 빛 보는 한민족의 굴곡진 역사를 상징한다고 하면 과장이려나. 어쨌거나 작품은 색이 곱고, 따뜻한 느낌을 전한다.
류경채 1968년작 ‘상량의 날’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추상화라고 하면 딱딱하고 차갑게, 종종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나 류경채의 추상이 이같은 온기를 풍기는 이유는 자연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그대로 스케치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인상깊은 자연을 한번 본 다음 마음 속에서 재현해가며 그리는 방법”을 취했고 그런 추상적인 해석에 감각적인 색채를 더해 고유한 화풍을 이뤘다. 특히 1960년대부터는 자연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선과 면의 기하학적 형태만 남았다.
“1959년에 서울풍경을 그릴 땐데 서울 한구석을 정확히 묘사하기보다는 서울 전체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잡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눈에 서울 전체를 느낄 수 있는 그림이 되지 않아 화폭을 지워 봤습니다. 지워보니 원하는 그림이 됐어요. 그냥 그린 것은 평면이었는데 그려놓고 지워보니 공간이 됐어요. 이것이 추상으로 변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원고지 수 백장 분량의 소설이 있는가 하면 한두장으로 축소한 시가 있습니다.”
그렇게 화가는 “마음에 비치는 심상의 에센스를 표현한 것이 추상”이라 했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기반한 추상미술을 추구한 장리석·이준·박창돈 등과 함께 ‘서정적 추상화’로 하나의 유파를 이뤘고 ‘창작미술협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류경채의 1969년작 ‘독백’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거의 대부분의 기록에서 류경채는 1920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하지만 실제 그는 여수 태생이다. 서울과 여수의 유족 등에 따르면, 가정사 때문에 일찍이 가출하다시피 집을 떠난 작가가 할아버지의 본적지인 해주를 출신지로 소개한 것이 ‘해주 사람’으로 굳어버린 것이라고 한다. 생전의 류경채 또한 여수나 고향에 관해서는 일절 말하고 싶지 않아 했을 정도로 과묵하고 완강했다. 살아서 연 개인전도 1983년과 1990년 딱 두 번 뿐이었다. 이화여대와 서울대 교수를 역임하며 후학을 양성한 탓에 시간도 없었거니와 극도로 엄격한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작품 수도 적었다. “내 그림은 살 사람도 없지만 팔 생각은 더더구나 없다. 그림 일로 안색을 바꾸는 일도 싫고 돈 받으려고 머리를 조아리는 일은 죽기보다 더 싫다. 차라리 한 끼를 굶는 것이 뱃속이 편하다”고 한 일화가 유명하다.
류경채 1979년작 ‘날 ’79-6’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나름 속 정(情) 깊고 흥(興)있는 사람이었던 것은 그가 특별한 날을 그린 그림에서 짐작할 수 있다. 1968년에 그린 ‘상량의 날’은 서울 신촌에 자신의 집과 작업실을 짓게 된 작가가 상량하는 날을 기념해 그린 기쁜 마음이 흥겨운 색감으로 전해진다. 그 집으로 들어가던 날을 그린 ‘입주의 날’은 분홍과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며 그 안에서 기뻐 대문 안팎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일 정도다. ‘단오’ ‘초파일’을 비롯해 1979년의 어느 날을 뜻하는 ‘날 ’79-6’ 식으로 제목 붙인 ‘날’ 연작도 그렇다. 휘두른 붓질의 흔적과 그것이 남긴 선과 색과 면 뿐이지만 그림과 관람자가 이루는 교감 속에 그날의 기억이나 기운이 말캉하게 손에 잡힌다. 류경채는 예술가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부인은 극작가 강성희(1921~2009)로 부부가 나란히 예술원 회원이었다. 아들 류훈과 류인 둘 다 조각가로 이름을 남겼다.
류경채의 ‘축전’ 시리즈는 작가가 완성한 절대적 추상세계를 보여준다. 둥근 원은 완전한 형태를 뜻하며 근원을 의미한다. 함께 있어 축복이다. 그래서 축전, 축하의 잔칫날이다. 당장 함께가 아니더라도 곧 만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있으니 더 기쁜 나날들이고, 기분 좋은 연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