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무엇이든 할 필요가 없었다.
조선 최고 부자집의 3대독자. 다정하고, 재치있고, 돈도 많은 그에게 세상의 낙이란 사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아가씨들 사이에서 멋지게 손 한번 흔들어주고는 집에 들어가 책이나 보는 한량. 그게 적성에 딱 맞았다.
사실 글쟁이라는 부류가 그렇다. 하고싶은 대로 하고, 쓰고싶은 대로 쓰고, 가고 싶은데 가는. 복에 겨워 그런 삶에 지칠때쯤 정혼자 생각이 났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만, 개화하지 못한 대갓집 애기씨는 여전히 자신을 기다릴거라 믿었다.
웬걸. “저 빛나는 여인이 내 정혼녀라고.” 그는 일생일대의 뮤즈를 그렇게 만났다. 일본에서 허송세월한 10년이 허탈했으나 고애신(김태리)의 마음에 김희성(변요한) 세글자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그는 그녀의 곁을 떠돌았다. 언제든 내가 저 여인을 숨겨줄 수 있는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그는 그 여인만을 바라보는 이들을 만났다. 지기도 아닌 것이 적도 아닌 것이, 왜들 서로 걱정하며 눈치를 보는지. 그들과 술 한잔 하고 거리로 나서자 머리 위로 하얀 벚꽃잎이 흩날린다. 그는 시를 읊듯 말했다.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난 날마다 죽소. 오늘 나의 사인은 화사요.”
그는 안다. 그녀의 마음을. 그녀를 아주 오래 지켜줄 수 있는 방법도. 혼인을 거부하는 그녀 곁에 앉아 또다시 시처럼 이야기를 꺼낸다. 꽃을 보는 방법은 두가지라고. 꺾어서 화병에 꽂거나 꽃을 만나러 길을 나서거나. 나는 그 길을 나서보려 한다고, 이건 아주 나쁜 마음이라고. 내가 나선 길에 꽃은 피어있지 않을테니. 그 댓가는 찰나의 무릎베게. 그거면 됐다. 충분하다. 나를 내던지기에.
김희성은 총, 칼 대신 펜을 들었다. 그리고 마치 연서처럼 호외를 써내려갔다. 피 없이 사람을 죽이고, 손대지 않고 분노를 키우는 호회만 내는 신문에 사람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무지했던 이들이 그를 통해 조선이 힘이 억눌리고 있음을 알게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07년 일본에서 조선인이 ‘전시’되고 있다는 소식에 결국 모두의 분노가 터져버렸다.
오늘까지 월세를 내라는 일식(김병철)과 춘식(배정남)에게 그는 회중시계를 맡긴다. “이런거 받으면 죽는디”라는 말이 심상치 않다. 펜과 유진 초이(이병헌)으로부터 받은 사진기. 그는 누구의 이야기를 쓰고 누구의 사진을 찍을 것인가. 의병이란 이름조차 얻지 못하는 그가 고애신을 위해 한 행동이 가문과 자신의 목숨까지 옥죄여 온다.
그는 끝까지 웃을 것이다. 어떻게든 웃겠지. 죽든 살든. 어쩌면 3년 뒤인 1910년, 더 이상 그의 손으로 기록할 것도 필요도 없는, 그녀조차 한성에 없는 ‘빼앗긴 하늘’에 사는 것이 그에게 진짜 죽음으로 느껴지는 것 아닐까.
/최상진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