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정부가 발표한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방안’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가 거세다. /연합뉴스
정부가 그린벨트 등을 풀어 수도권에 30만 가구를 공급하기로 한 ‘9·21 공급대책’에 경고등이 켜졌다.
1차 개발지역 공개만으로도 주민과 지방자치단체들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첫 삽을 뜨기도 전에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린다.
전문가들은 주민 반발을 사전에 잠재우지 못할 경우 정부의 주택공급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2일 부동산 업계와 지자체들에 따르면 정부의 9·21 공급대책 발표 이후 일부 공공주택이 들어설 지역을 중심으로 주민과 지자체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경기도 광명시는 지난달 27일 보도자료를 내고 국토부가 하안2지구를 신규 공공택지지구 지정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광명시는 하안2지구 개발 반대 이유로 지역 주민과 영세 소상공인 생계 문제, 미흡한 교통대책, 광명 뉴타운 침체, 하안동 기존 시가지 슬럼화 우려, 신혼부부·청년 일자리 창출 대안 부족 등을 들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주택공급이 많은 상태에서 추가 공급이 이뤄질 경우 집값 하락과 교통 혼잡 등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시흥·성남시 등도 개발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발 방식과 개발이익 환원 등과 관련해서는 일부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정부의 개발계획에 지자체 입장을 반영해 달라는 포석이다.
지난달 말에는 서울 송파구와 강동구까지 반대 행렬에 가세했다.
박성수 송파구청장은 주민들이 옛 성동구치소 부지에 공공주택을 짓겠다는 서울시 계획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지난달 29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실질적 이해관계자인 송파구청과 지역 주민들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정책을 발표한 점은 잘못됐다”며 비판했다.
송파구는 당초 주민과의 약속대로 성동구치소 부지에 복합문화시설과 청년 일자리 지원시설 등을 지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강동구는 고덕 강일지구에 신혼희망타운 3,538가구를 공급하겠다는 정부 계획에 반기를 들었다.
고덕·강일동 일대에 이미 청년과 신혼부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주택이 1만 가구 이상 공급되고 있는데 신혼희망타운을 더 짓겠다는 것은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지자체들이 일제히 반대 의견을 표출하는데는 주민들의 반발이 예상보다 크기 때문이다.
정부의 대책 발표 직후 지자체들은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이었으나, 추석 연휴 기간을 거치면서 지역 내 일부 부정적 여론의 영향으로 ‘조건부’ 내지 ‘맞춤형’ 개발을 요구하는 쪽으로 흐름이 변했다.
송파구 가락동 일대 주민들은 ‘성동구치소 졸속개발 결사반대 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세력화할 조짐이어서 사업추진이 녹록지 않을 전망이다.
신혼희망타운이나 신규 택지가 들어설 지역의 주민들은 특히 임대주택 건립과 교통·생활여건이 악화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고덕지구 관련 주민들이 모인 한 인터넷 카페에는 강동구 강일지구 신혼희망타운의 상당수를 임대주택으로 짓는 게 아닌지, 어린이집 등 육아·보육시설과 초등학교 등 학원시설이 부족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인구 증가로 교통체증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지 등에 대한 우려의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3기 신도시 건설 계획에 대해서도 지자체의 반발이 거세다.
전문가들은 유력 신도시 후보지로 과거 보금자리주택지구로 지정됐다 해제된 광명 시흥지구와 하남 감북지구, 안양시가 추진하고 있는 박달테크노밸리 조성사업과 고양시 장항동 일대, 과천시 일대 등을 유력 후보지로 꼽고 있다.
그러나 광명시는 이미 하안2지구 개발계획에도 반대 입장을 내 추가 신도시 지정 여부는 미지수다.
과천시는 앞서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정부가 안산 2곳, 과천, 광명, 의정부, 시흥, 의왕, 성남 등 경기도 8곳을 신규택지로 지정하기 위해 작업 중”이라는 자료를 공개한 이후 벌써 시민단체와 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그린벨트 해제 반대 여론이 거세다.
2기 신도시 주민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정부가 3기 신도시를 서울과 반경 20km 이내에 건설된 1기 신도시 사이에 지정하겠다고 밝히면서 입지여건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곳에 건설된 2기 신도시는 집값 하락, 미분양 증가 등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특히 미분양이 남아 있는 김포 한강·인천 검단·파주 운정 등 2기 신도시 주민들의 반발이 크다. 가뜩이나 공급물량이 많은데 3기 신도시가 조성될 경우 서울에서 더 먼 2기 신도시는 찬밥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3기 신도시 조성 반대와 2기 신도시 대중교통 확충을 요구하는 청원이 쏟아지고 있다.
한 청원인은 “2기 신도시인 파주 운정신도시는 규모가 일산보다 큰 운정 1, 2, 3지구로 개발되고 기존 교하지구를 포함해 경기 서북부 최대 신도시로 지정돼 있는데 운정 3지구에서 아직 4만가구 이상의 신규 분양이 남아 있다”며 “이러한 거대 분양물량을 두고 3기 신도시 카드들 내놓는 것은 2기 신도시를 죽이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택지개발 등 지정 권한이 정부에 있지만 앞으로 일선 지자체나 주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앞으로 대규모 개발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 박근혜 정부 시절 공약으로 추진했던 ‘행복주택’ 사업이 대표적이다.
당시 정부는 목동 유수지와 잠실·탄천유수지에 임대주택 중심의 행복주택을 공급하려 했으나 거센 주민 반발에 부딪혀 결국 지구지정을 취소해 사업이 좌초된 바 있다.
직방 함영진 빅데이터랩장은 “과거에는 신도시 개발을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개발이 상당수 진행된 현재는 오히려 재산권 침해 등을 이유로 반대가 심한 시대가 됐다”며 “정부 9·21대책 발표 이후 반응으로 볼 때 지역 주민과의 소통과 정책조율이 선행되지 않으면 택지 지정과 수용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 성동구치소나 고덕 신혼희망타운도 임대주택 비율을 높일 경우 반발이 더욱 거셀 전망이다. 그린벨트 해제를 통한 택지 개발과 주택 공급은 현 정부의 주요 지지층인 시민단체들도 반대하고 있다.
익명을 원한 한 부동산 전문가는 “주민들이 반발하면 민선 지자체장들은 아무리 같은 당이라 해도 정부 정책에 동의할 수 없고, 이로 인해 정부 정책 목표에도 차질이 빚어지는 일이 반복되며 ‘님비 현상’이 점점 더 심화하고 있다”며 “부족한 공급을 충족하면서 주민과 시민단체 등의 반발을 잠재울 수 있는 정부 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말했다.
정부는 일선 지자체 등의 반발에 당황하면서도 일단 공급 계획을 원칙대로 추진해나간다는 입장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9·21대책에서 1차로 발표한 택지는 지자체 등과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협의가 완료된 것들”이라며 “향후 주택공급 일정도 계획대로 차질없이 진행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개발계획에 앞서 지역 주민들의 공감대를 얻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자산관리연구원 고종완 원장은 “개발 정보가 사전에 유출될 경우 투기 등을 우려해 ‘비공개’ 원칙을 우선으로 하다 보니 일선 지자체까지 충분한 교감 없이 개발계획이 발표되고, 주민·지자체 반발로 이어지는 문제가 있다”며 “개발 방식을 좀 더 공개적으로 처리하며 주민 공감대를 얻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외주건 김신조 대표는 “당장 집값을 잡기 위해선 용적률 상향이나 서울시의 도심 오피스 활용보다는 ‘신도시 개발’이 속도가 빠르고 충격파도 크기 때문에 정부가 손쉬운 방법으로 (택지개발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나 대규모 개발이 점점 어려워지는 만큼 장기적으로 불필요한 용도 규제를 손질하고 재개발·재건축을 활성화해 도심 주택공급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성문인턴기자 smlee91@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