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근교의 한 콘도에서 근무하던 A씨는 상사의 부당한 업무지시에 시달리던 중 객실배정에 불만을 품은 고객에게서 욕설을 들은 일을 계기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A씨가 생명과 바꿀 정도의 불가항력적인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며 ‘업무로 인한 자살’을 인정하지 않았다. A씨가 생전에 업무 때문에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이 없었던 점도 공단의 판단 근거가 됐다.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변호사)는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규정은 현실적으로 정신질병 치료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업무와 자살의 관련성이 인정될 여지를 매우 좁게 해놓았다”고 지적했다.
정신질환 산업재해 신청과 인정의 문턱을 크게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제도를 개선한다 해도 정신질환과 관련한 사회적 낙인을 지우지 않는 한 실질적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3일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11월 말 기준 자살을 포함해 정신질환으로 인한 근로자의 산재 신청은 총 194건이었다. 이 중 112건(57.7%)이 산재로 인정받았다. 정신질환 산재는 2013년 137건 신청, 53건 승인(38.7%)에 그쳤지만 신청 숫자와 승인율 모두 꾸준히 올랐다.
문제는 정신질환 산재 신청 건수가 지나치게 적다는 것이다. 이용득 의원실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최근 개최한 ‘자살·정신질환 산재 판정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에서 이이령 가톨릭대 성모병원 직업환경의학 교수는 “국내 성인의 25.4%가 평생 한 번 이상 정신질환에 걸리며 지난 1년간 정신질환을 앓은 비율도 11.9%(470만명)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관련 산재 신청 수는 너무 적다”고 설명했다. 인구가 우리의 약 2.5배인 일본은 정신장애 산재 청구가 1,515건(2015년 기준)에 달해 우리나라보다 8배나 많았다.
전문가들은 근로자들이 정신질환 산재 신청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로 유병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꼽는다. 불안장애나 조현병(정신분열증) 같은 일부 정신질환은 거의 산재 승인이 나지 않는 등 제도·행정상의 문턱이 높다는 점도 문제다. 이 의원은 “우리 사회가 정신질환과 자살에 가진 편견 때문에 근로자들이 업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며 “근로자가 정신질환 산재 접근권을 강화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정치권은 정신질환 산재 신청·승인 요건을 완화하기 위한 개선안을 마련하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직장 내 괴롭힘과 고객의 폭언으로 인한 정신질환도 산재로 인정하는 내용의 산재보상보험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고용노동부는 일부 신체 질병에 적용했던 ‘산재 추정의 원칙’을 정신질환까지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추정의 원칙은 직업경력, 사업장 환경 같은 객관적인 기준을 충족하면 근로자가 별도 입증을 거치지 않아도 산재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고용부는 의학자문위원회를 상설화해 정신질환의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을 마련하고 업무 관련성 평가 전 특진을 정신질환 유병 근로자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다만 고용부 관계자는 “제도적 개선안이 확립돼도 정신질환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말했다.
/세종=이종혁기자 2juzs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