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의 제조 현장에서 근로자들이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다. 중소기업계에서는 근로시간 단축이 전격 시행돼 생산성 저하, 인건비 부담 등으로 지속적인 경영이 어려워 졌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경제DB
지난 7월부터 근로시간 단축에 들어간 자동차부품 업체 C사는 요즘 인력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 완성차 업체 GM과 글로벌 자동차부품 업체 델파이·발레오 등에 알루미늄 주물을 납품하는 이 회사는 현재 주간조와 야간조 각각 하루 10시간씩 일하고 주말 특근을 폐지해 주당 50시간 근무를 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생산능력 대비 인력가동률이 70% 수준이어서 문제가 없지만 수주가 늘거나 납품기일이 줄어들면 현재의 인력구조로는 대응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이 회사의 인사팀 관계자는 “생산량을 늘리려면 인력을 추가 채용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주말 특근을 없앤 후 실수령액이 줄어드니 가뜩이나 어려운 구인난이 더욱 가중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 회사가 자리한 익산산업단지공단에서도 이직 등 인력 쏠림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주당 52시간 근무가 적용되지 않는 300인 미만 기업체로의 인력 이동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일이 편한 직종으로 몰렸는데 근로시간 단축으로 특근을 없애니 일감이 있는 곳으로 인력이 쏠리고 있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인상에다 심화되는 불경기로 허덕이던 중견·중소기업들이 근로시간 단축의 거센 후폭풍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8일 서울경제신문 취재진이 주52시간근무제 시행 100일을 맞아 중견·중소업계를 취재한 결과 현장의 혼란과 고통은 당초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근로자들은 특근 수당이 사라지면서 실수령액 감소로 생계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으며 조업시간 감소로 매출이 줄어든 중소기업들은 경영난이 가중되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의 취재에 응한 기업들은 주52시간근무제 시행 이후 급여 감소액에 대해 통상 300만원 전후를 받던 근로자의 임금이 최소 40만원에서 최대 100만원가량 줄었다고 답했다. 당장 월급봉투가 얇아진 근로자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근로시간 단축이 적용되지 않은 소규모 업체로 속속 이탈하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당초 정책 목표와 달리 상대적으로 열악한 일자리로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중소기업계가 근로시간 단축으로 가장 어려움을 겪는 점은 생산성 저하를 메울 뾰족한 수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조업 현장에서는 근로시간 단축으로 생산 차질과 납기일 경과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만 인력 충원 속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마저도 채용·투자 여력이 있는 일부 중소기업들에 국한되는 얘기로, 대다수는 근로시간 단축 후폭풍에 대응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는 근로시간 단축이 시행되기 전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기업 500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근로시간 단축 시행 시 ‘가동률 저하로 생산 차질 및 납기 준수 곤란(31.2%)’을 가장 많이 꼽았다. 단축 후에는 평균 6.1명의 인력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면서 현재 대비 생산 차질은 20.3%, 근로자 임금은 월평균 247만1,000원에서 220만원으로 10.97%(27만1,000원)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사출성형기 제조업체인 D사의 이수혁(가명) 대표는 “우리 회사는 주 58시간을 일해왔던지라 6시간 줄이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게 아니다”라면서도 “하지만 고객 업체들이 조업시간을 단축하는 과정에서 사출성형기 수요까지 줄면서 예상치 못한 매출 감소로 이어졌다”며 한탄했다. 이어 “영업부서 직원이 총 60명이었는데 장비를 팔러 공단에 가면 그쪽 공장들 가동률이 50%도 안 돼 영업 자체가 안 된다”며 “공장이 인천에 있는데 통근버스를 두 대 운영하다 최근에는 한 대로 줄였는데도 이직하는 이들이 많아 한 대도 다 못 채운다”고 덧붙였다.
전자부품 업체 E사의 황운석(가명) 대표도 근로시간 단축이 트리거가 돼 경력이 많은 직원들이 떠나게 됐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0여명 되는 퇴직자가 ‘급여가 줄어 이대로는 일을 못하겠다’면서 사표를 냈다”며 “주 52시간을 적용하면서 임금이 20~30% 정도 줄었고 숙련자가 대부분이었던 이들이 자리를 비우면서 공장 전체에 상실감이 퍼진 상태”라고 말했다. 일부 업체는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한 인력 투입 감소를 신규 설비투자로 대응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공정에 사람의 손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평이 대부분이다. 가구 업체 F사의 안의수(가명) 대표는 “근로시간 단축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직 10명을 신규로 채용했지만 공장에 일하러 오겠다는 사람이 없어 이마저 겨우 구했다”며 “설비투자대로 돈은 들어가고, 인건비는 올라가고, 고객의 주문에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설비투자를 통해 생산성 저하를 막으려는 시도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한국산업은행이 2014년부터 전국 3,550개 국내 기업체의 설비투자 실적을 조사한 결과 300인 미만 제조업체의 올해 투자 계획 금액은 15조4,953억원으로 처음으로 상승세로 돌아섰다. 그동안 300인 미만 중소 제조업체의 설비투자액은 2014년 19조9,550억원에서 2015년 17조8,409억원, 2016년 15조6,830억원, 2017년 14조9,845억원으로 3년 연속 하락했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 경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경기 침체가 수년째 이어지는 상황인데 300인 미만 중소 제조업체를 중심으로 올해 설비투자 계획 금액이 늘어난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면서 “이는 경기 상승 국면에서 발생하는 자발적인 투자 확대라기보다는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이벤트에 대응한 비자발적인 설비투자가 늘어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원 중기중앙회 인력지원본부장은 “중소기업 현장에서 장시간 근로가 불가피한 것은 노동시장에서 청년층이 중소기업 취업을 꺼리면서 발생한 측면도 있다”며 “근로시간이 줄면 기업들이 그만큼 일자리를 늘릴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을 선진국 수준으로 확대하는 등 근로시간 제도의 유연화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원도 “미국·일본·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들은 근로시간을 단축하면서 보완책으로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을 1년으로 길게 설정했다”며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을 노사합의 시 1년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수민·서민우·김연하기자 noenem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