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통방문'의 길이

김능현 경제부 차장


한국은행 기준금리 결정의 방향을 엿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는 금리 결정 직후 배포되는 A4 한 장짜리 ‘통화정책방향(통방문)’ 자료다.

한은이 금리를 결정할 때 고려하는 요소가 이 한 장에 압축돼 있다. 이성태 총재 시절 통방문의 길이는 450자 안팎이었다(띄어쓰기 포함). 후임인 김중수 총재의 임기 마지막에는 통방문 길이가 990자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현 이주열 총재 들어서는 통방문 길이가 또다시 1,260여자로 늘어 A4 용지 한 장에 오롯이 담기 힘들 정도로 빽빽해졌다. 조만간 두 장짜리 통방문이 배포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내용도 디테일해졌다. 이성태 총재 시절 통방문에는 국내 경기와 소비자물가, 금융시장 상황 정도만 언급됐지만 요즘 통방문에는 고용 상황부터 근원물가, 주요국의 통화정책 변화, 가계부채,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수많은 변수가 언급돼 있다.


세상이 갈수록 복잡해지니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면서도 우리 경제를 둘러싼 환경이 그만큼 녹록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한은이 추구하는 통화정책의 목표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시장은 더 이상 한은을 믿지 않는다. 지난 8월 기준금리 결정 당시 이주열 총재가 “인상 깜빡이를 끄지 않았다”는 신호를 분명히 했는데도 금리가 급락한 것은 한은에 대한 시장의 신뢰도가 바닥까지 떨어졌다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시장은 이제 한은 총재의 입이 아니라 이낙연 국무총리나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청와대 관계자 같은 정부 당국자의 말을 더 믿는다.

지금 한은은 꺼져가는 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최대한 저금리 기조를 끌고 갈 것이냐, ‘과잉 유동성 탓에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는 정부 당국자의 불만이나 미국의 통화 긴축 기조를 따라 금리를 올릴 것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옳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실 신의 영역에 가깝다. 자산 가격에 대한 주요국 중앙은행 수장의 대응방식만 봐도 제각각이다. 앨런 그린스펀이나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자산 거품을 막기 위해 통화정책을 쓰는 것은 큰 망치(금리)로 뇌수술을 하는 것과 같다”며 주택이나 주식 시장의 거품을 터트리기 위한 수단으로 금리를 올리는 것에 반대했다. 반면 장클로드 트리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인플레가 낮더라도 자산 붐에 대응해 통화 긴축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위에 언급된 세 수장 모두 시장에 일관된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이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의 통화정책은 미국이나 유럽의 중앙은행보다 금리 결정에서 고려해야 할 요소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경제의 모든 변수를 고려하며 1년간 ‘깜빡이’만 켜고 직진하는 통화정책으로는 시장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오는 18일 금리 결정 후에는 한은의 입장이 좀 더 명확히 시장에 전달돼야 한다. 그래야 금리에 울고 웃는 경제주체들이 한은을 믿고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 듯하다. /nhkimchn@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