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Who-사우디 젊은 왕세자, 빈 살만의 두얼굴]개혁 vs 탄압 아슬아슬 줄타기...서방 우군도 등 돌리나

여성운전 허용 등 각종 금기 깨며
국제사회서 사우디 이미지 개선
국내선 1인 권력구도 강화 위해
반체제 인사들 거침없이 숙청
언론인 카쇼기 암살 배후로 거론
버진그룹 10억弗 투자논의 중단 등
서구기업 사우디와 거리두기 시작


“사우디아라비아에 ‘와하비즘(Wahhabism)’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지난 4월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와하비즘이 사우디를 다스리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며 사회경제적 개혁을 통한 온건 이슬람 국가로의 복귀를 사명으로 내걸었다. 와하비즘은 사우디 건국이념의 기초로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를 말한다. 사우디 왕가는 그동안 와하비즘 성직자들로부터 종교적 정통성을 부여받아온 만큼 33세의 젊은 왕세자가 한 이 같은 발언은 사우디를 비롯한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강경 보수 종교계와 이에 따른 사회 관습에 부정적 입장을 내비치며 전근대적인 사우디의 종말을 선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수단이 아니라 끝(개선된 상황)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50년간은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킬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자신의 말을 입증하듯 그는 강력한 권력집중을 위해 정적과 반체제 인사에 대한 가차 없는 탄압을 가하고 있다. 특히 최근 사우디 유력 언론인 자말 카쇼기가 그의 사주로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살해됐다는 의혹이 커지면서 그의 구시대적인 탄압정치가 국제사회에 새로운 논란거리로 부상했다. 사우디에 새 질서를 마련할 시대의 영웅인지, 반정부 언론인 카쇼기의 비유대로 ‘중동의 푸틴’이 그의 민낯일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은 막냇동생과 조카를 왕위 계승자 자리에서 연이어 쫓아내고 아들인 빈 살만을 왕세자로 임명했다. 형제 간 권력승계 원칙을 버린 세대교체였다. 덕분에 시작부터 과거와 단절하고 출발한 빈 살만 왕세자는 1932년 사우디 건국 이후 86년간 굳어진 각종 금기를 깨며 국제사회에서 사우디의 이미지를 바꿔나갔다. 남녀가 함께 입장할 수 있는 극장을 마련하고 6월에는 세계 유일의 여성운전 금지 국가라는 오명도 벗었다. 사우디를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5,000억달러 규모의 미래 신도시 ‘네옴’ 건설계획을 발표하는 등 혁신 프로젝트들도 연이어 선보였다. 사우디 전통의상인 터번과 토브를 벗고 노타이에 정장 차림으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만난 장면은 사우디의 개혁 의지를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근대화를 향한 거창한 계획과 달리 국내에서 빈 살만 왕세자의 정치 행보는 냉혹 그 자체였다. 구식 경제·사회구조에서 벗어나 정상국가로 변신하겠다는 포부를 보였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반체제 인사들을 거침없이 숙청하며 구시대적인 권력집중 방식을 취했다. 왕세자 임명 직후 성직자와 지식인·행동가 등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한 데 이어 지난해 11월에는 다수의 기업인과 왕족들을 호텔에 연금해 1,000억달러가 넘는 막대한 재산을 강제로 양도받았다. 빈 살만 왕세자가 암살을 계획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카쇼기도 일찌감치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혀 미국 등에서 피신하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빈 살만 왕세자의 강력한 탄압이 사우디에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와하비즘 지지 세력이 여전히 견고하고 왕권의 보수적 통치를 불러온 1979년 메카 무장반란(서구화에 대한 비판과 왕가의 퇴진을 요구한 괴한부대가 사우디의 최대 이슬람 성지를 장악해 360명이 사망한 사건)의 여파가 약 40년간 이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절대왕정 국가인 만큼 권력에서 밀려난 왕자들의 막후 게임이 상황을 급반전시킬 수 있어 권력 공고화는 필수적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사우디에서는 개혁과 탄압을 분리할 수 없다”며 “전근대 국가에서 개혁을 추구하는 군주는 끊임없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억압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고 전했다.

그러나 빈 살만 왕세자의 무자비한 탄압이 왕가는 물론 경제계 내부에도 균열을 초래하면서 그의 행동이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의 개혁을 향한 것인지 잠재적 경쟁자를 무력화해 권력 강화를 꾀하려는 속셈인지에 대한 논란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특히 이번 카쇼기 사건은 빈 살만 왕세자가 드라이브를 거는 서방국가와의 관계 개선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동맹국인 미국도 사우디에 투명한 조사 결과를 요구하는 등 국제사회의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서구 기업들은 사우디 정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가디언 등에 따르면 영국 버진그룹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 회장은 사우디 국부펀드 PIF가 10억달러(약 1조1,400억원)를 투자하는 계획에 대한 논의를 중단했다. 오는 23~25일 사우디 리야드에서 PIF 주최로 열리는 글로벌 투자 콘퍼런스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에 참석하려던 미국 측 거물급 인사들도 손사래를 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해 사우디의 외국인직접투자 규모가 14억달러로 전년의 75억달러에서 크게 줄었다고 인용하며 “왕세자의 초법적 행동이 초래한 자금유출”이라고 분석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중동 출신의 한 인권운동가는 “강력한 방법에 기댄 왕세자 자신이 개혁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가장 큰 위험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민주기자 parkm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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