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다른 나라가 300년 넘게 걸린 근대화를 30년 만에 달성하는 압축 성장을 거쳤다. 압축 성장은 근대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단기간에 완성됐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압축 성장은 혜택만큼 엄청난 갈등을 낳았다.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세대가 동시에 존재하면서 세대 충돌의 가능성이 커진다. 보통 세대교체가 30년 단위로 일어난다고 해보자. 300년의 근대화는 10번의 세대교체를 통해 일어나므로 세대 충돌이 일어날 일이 그만큼 줄어든다. 반면 30년의 근대화는 세대교체가 일어나기도 전에 세상이 바뀌니 다양한 세대가 함께 있으면서 갈등의 가능성도 그만큼 늘어난다. 즉 세계는 바뀌었지만 기성세대가 여전히 시대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데 그 뒤로 다음 세대와 그다음 세대가 계속 들이닥치고 있다. 그 결과 세대교체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고 세대 중복이 일어나고 있다.
압축 성장은 이념 갈등의 가능성을 키운다. 300년의 근대화는 세대교체와 함께 이념 교체를 동반하게 된다. 300년 안에 집권 정당의 변화가 일어나고 시대의 요구가 달라지면서 이념의 지형도가 자연스럽게 바뀔 수 있다. 반면 30년의 근대화는 세대 중복이 겹쳐지면서 이념의 교체가 발생할 시간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 결과 30년의 근대화에는 극좌에서 극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념의 스펙트럼이 광범위하게 상존하게 된다.
요즘 세대 중복과 이념 갈등이 나타나면서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의 이슈가 지켜야 할 절차와 더불어 정리되지 않고 정국의 전개에 따라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예컨대 지난 1980년 5·18은 민주화 항쟁으로 역사성을 획득했지만 여전히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의 난동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있다. 또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고 1심에서 유죄로 확정됐지만 여전히 그 모든 과정이 정치 보복이라며 승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처럼 굵직굵직한 사회 현안만이 아니라 지역과 개인 사이의 문제도 각자 서로 옳다면서 해를 넘겨 가며 논쟁을 벌인다.
맹자는 사람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릴 수 있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공통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장자의 말처럼 각자 자신의 주장이 옳고 다른 사람의 주장이 그르다고 고집한다. 이를 앞과 뒤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의 방향을 두고 말해보자. 방향은 기준이 어디냐에 따라 전후와 좌우가 서로 뒤바뀔 수 있다. 내가 바라보는 쪽이 앞이면 등이 향하는 쪽은 당연히 뒤가 된다. 반면 나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기준으로 앞과 뒤를 정하게 되면 나의 앞이 뒤가 되고 나의 뒤는 앞이 된다. 어떤 장소를 들어가는 방향으로 보는 경우와 나오는 방향으로 보는 경우 좌우가 서로 엇갈리게 된다. 우리는 간혹 전화로 앞과 뒤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을 말하다가 막상 현장에 이르면 헷갈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장자는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다가 제3의 인물에게 판정을 부탁하게 되더라도 결코 합의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형식상 제3자라고 하지만 그 사람도 결국 자신의 입장에 서서 판정하게 되므로 둘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반대쪽에 있는 사람이 제3자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장자는 이러한 불일치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문짝과 문틀을 이어주는 지도리를 끌어들여 도추(道樞·도의 지도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도추는 원의 중심처럼 모든 것과 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사람이 도추의 입장에 선다면 진영논리를 벗어나 합의와 승복의 결과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은 이해와 정파에 따라 하나의 사안에 대해 다른 주장을 펼칠 수 있지만 국익과 인류애 그리고 인권 같은 공통의 기준에 서서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우리가 전자에 맹목적으로 충실하기만 하고 후자를 도외시한다면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후자의 도추를 찾을 수 없다. 도추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대 중복과 이념 대립이라는 압축 성장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