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현지시간) 중국 상하이 번화가의 대형 쇼핑몰에 입점한 코스메틱 브랜드 ‘나스’ 매장을 찾은 고객들이 점원으로부터 제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상하이=이수민기자
# 지난 13일(현지시간) 상하이 번화가 난징동루의 대형 쇼핑몰 레이플스에 입점한 ‘나스’ 매장에는 가을 시즌을 맞이해 출시된 색조 화장품을 구경하러 온 젊은 중국인들로 북적였다. 줄까지 서가며 차례를 기다리던 이들은 피부톤에 맞는 립스틱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곳에서 만난 대학생 구오(23)씨는 “지하에 있는 에뛰드는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입생로랑을 제일 좋아하지만 최근 시세이도 계열의 나스도 인기가 좋아 친구와 함께 구경하러 왔다”며 “예전에는 한국 화장품도 종종 구매했지만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아무리 싸도 한국 중저가 브랜드는 쓰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는 “대학 친구들끼리 화장품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샤넬이나 톰포드 정도는 갖고 있어야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며 야심 차게 대륙에 진출한 K뷰티 로드숍 브랜드들의 아성이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다. 2010년대 중반까지 중국은 K뷰티 브랜드의 엘도라도로 손꼽혔지만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여파에다 글로벌 브랜드와 중국 로컬 브랜드의 협공에 밀려 더 이상 사세 확장을 꾀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당초 국내 주요 뷰티 기업들은 중국 시장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해외 진출의 기반을 다진 후 인도와 베트남·필리핀 등 인근 지역으로 사세를 넓힌다는 계획이었으나 중국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며 글로벌 전략에 타격을 입은 것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중국 정부의 사드 보복이 기폭제가 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색조·프리미엄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장의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했다고 입을 모은다.
중국에서 한국 브랜드 A사 매장을 열었다가 장사가 안 돼 접었다는 교민 최욱현(가명)씨는 “중국 시장에서 잊힌 (한국) 브랜드가 한둘이 아니다”라며 시장 상황이 녹록지 않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때 ‘가성비’나 ‘동양인 피부를 잘 안다’는 마케팅을 내세워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국 브랜드들은 매장 확대에 더 유리한 로컬 브랜드들에 밀리고 전통적으로 K뷰티가 강점을 갖고 있던 스킨케어 품목에서는 시세이도와 같은 일본 제품에, 색조 화장품은 로레알·에스티로더그룹에 치인다는 지적이다. 그는 “화장품 주 소비층인 중국의 20~30대 여성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화장품 브랜드를 남에게 과시하는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짙어 에스티로더·로레알그룹의 글로벌 브랜드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며 “포지셔닝이 어정쩡했던 라네즈·마몽드 등 국내 중저가 브랜드들은 이런 추세를 따라잡지 못하고 결국 소비자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유로모니터인터내셔널차이나의 스테파니 야오 선임연구원도 “중국의 뷰티 시장을 견인하는 소비층인 젊은 소비자들은 보이는 것에 관심이 많고 최신 트렌드에 민감하며 새로운 제품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며 “중국 젊은 소비자들이 하이엔드 제품 위주로 구매하는 패턴을 보이면서 디올·랑콤·샤넬·입생로랑 등이 매년 매출을 늘려나가는 추세”라고 짚었다.
지난 13일(현지시간) 중국 상하이 와이탄 지역에 출점한 이니스프리 매장에 사람이 많이 없어 한산한 모습이다./상하이=이수민기자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한 K뷰티의 현주소는 아모레퍼시픽(090430)의 중국 실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KB증권은 이달 초 발간한 ‘걱정되는 중국 성장세’라는 보고서에서 아모레퍼시픽 중국법인의 올 3·4분기 매출액을 전년 동기 대비 4% 증가하는 데 그친 3,076억원으로 전망했다. 이는 아모레퍼시픽 측에서 당초 예상했던 10% 후반대의 증가율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박신애 KB증권 연구원은 “이니스프리·라네즈·마몽드 등 아모레퍼시픽의 중가 브랜드의 중국 내 성장률이 모두 역신장하고 있다”며 “이니스프리의 경우 출점 수를 지속적으로 늘리고 신제품 출시도 강화하고 있지만 기존 직영 점포의 성장률이 부진한 상황이고 설화수도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 미만이어서 전체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눈앞의 성과에 급급해 단기 마케팅에 몰두한 점도 실패 원인으로 꼽힌다. 중국 상하이에서 6년째 화장품 도소매를 해왔다는 교민 박우식(가명)씨는 “요새 한국 중저가 브랜드는 중국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며 “구매대행을 하는 다이거우(보따리상)와 파워블로거(왕훙) 마케팅에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다이거우들이 한국에서 면세가(정가의 최대 50% 할인)로 들여와 시장에 푸는 바람에 단독 매장을 운영하는 곳들은 고정비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 면세점에서 매출을 높이려고 중국인들에게 할인 혜택을 많이 주면서 제시한 구매대행 가격이 중국인들에 실질적인 가격으로 각인되며 정가 정책이 전혀 먹히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상하이 에게안 플레이스에 최근 입점한 글로벌 코스메틱 브랜드 병행수입 전문매장 컬렉션숍 ‘GDFS’의 전경./상하이=이수민기자
여기에다 중국 유통계의 최근 변화도 K뷰티의 설자리를 빼앗고 있다. 최근 상하이 한인촌 인근 대형 쇼핑몰인 ‘에게안 플레이스’에는 시슬리·랑콤·SKⅡ 등 현지에서 인기가 높은 글로벌 브랜드를 회원들에게 면세가로 제공하는 컬렉션숍 ‘GDFS’가 문을 열었다. 온라인 판매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이곳은 연 118달러를 내면 최대 60%까지 횟수 제한 없이 할인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내세워 글로벌 브랜드를 선호하는 현지 소비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곳에는 산다화 오일을 주원료로 하는 로컬 브랜드 ‘린칭쉬안’도 입점했는데 400여개 단독 매장을 운영하는 린칭쉬안은 용기 디자인이나 제품 구성 면에서 한국 브랜드와 흡사한 제품을 선보이면서도 알리페이에서 ‘비누 제품 1위안 판매 이벤트’ ‘유명 배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행사’와 같은 현지 밀착 마케팅을 펼치며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었다. 이 밖에도 ‘원리프’와 ‘한후’ 등이 자연 친화적인 원료와 K뷰티의 콘셉트를 차용한 이미지로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박종대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중저가 브랜드는 중국 로컬 브랜드에서도 주 타깃이다 보니 시장 경쟁이 치열한 상태”라면서 “중국에서 대표적으로 잘되던 한국 브랜드인 이니스프리의 경우 트렌드를 주도하던 과거 3~4년 전에 영업망을 빠르게 늘렸어야 했지만 직영점을 고집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연구원은 또 “현지 매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국내 면세 판매가나 물량을 조정하는 업체들이 늘어나는 추세”라며 “설화수·후 같은 프리미엄 시장이 여전히 건재한 만큼 K뷰티가 다시 한번 중국을 포함한 글로벌 전략을 재정비해야 할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상하이=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 허세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