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절도’ 1981년, 캔버스에 유채, 160x112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제주는 검은 빛”이라고 말한 그는 고향이 제주라고 했다. 화산섬 제주의 현무암이 검은색이니 땅도 검고 그 돌로 쌓아올린 담도 검다. 푸른 바다 푸른 하늘이지만, 검은 바다 검은 하늘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 제주의 자연의 풍경이니 그럴만했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그는 오색창연한 다채로움이 겹치고 겹쳐진 색이, 역사의 쌓이고 쌓인 모습이 검은 빛으로 보인다고 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중년 이후 이곳에서 생을 마무리 한 화가 변시지(1926~2013)에게 제주는 ‘누런색’이었다. 가을바람이 추수 앞둔 들녘을 쓰다듬을 때면 통통하게 익어 고개 떨군 벼들이 펼쳐 보이는 깊은 누런 색의 파도 같은, 그런 색이다. 황토색은 고향의 색이요, 황금색은 풍요의 색이며, 갈색은 자연의 색이다. 이 셋을 다 섞은 듯한 변시지 특유의 황갈색을 뭐라 불러야 할까. 어릴 적 시골 외가집의 아랫목 뜨근한 자리가 진하게 바랜 방바닥 장판색 같기도 하다. 구수한 밥 지어내고 가마솥에 눌러붙은 누룽지 색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변시지의 풍경화에서 그런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식어버린 아련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왼편 저 멀리서 폭풍이 밀려온다. 작은 섬을 후려치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저것이 차라리 한 무더기 핀 구절초, 쑥부쟁이였으면 좋으련만. 하나하나 쌓아올린 검은 돌담을 금방이라도 무너뜨릴 기세다. 초가지붕도 위태롭다. 외로이 솟은 나무마저 잔뜩 휘었다. 그 아래 남자 하나가 웅크리고 앉았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그의 유일한 벗이 조랑말이다. 야윈 그 등에 올라타지도, 설령 탄다 한들 섬 밖으로 달아나지도 못할 망아지지만 너라도 있어 다행이다. 변시지의 1981년작 ‘절도(絶島)’는 끊어진 섬이라는 제목처럼 처연하다. 태풍으로 고립된 섬과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웅크리고 주저앉은 인간의 근원적 고독으로 꽉 찬 그림이다.
변시지 1984년작 ‘하산(下山)’. 제주 SK핀크스 골프장에서는 이 작품의 연작인 ‘하산Ⅱ’를 볼 수 있다.
변시지는 1977년을 즈음해 본격적으로 고향인 제주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제주 그림에 사치스러운 남국의 풍요는 없다. 폭풍으로 쓰러질 듯한 바닷가 초가집과 무너질 듯한 돌담, 넘어질 것 같은 조랑말 등이 주요 소재였다. 그의 황색은 고독하기는 하나 절망적이지는 않다. 아니, 흙과 뿌리를 닮은 그 색에서 오히려 희망을 본다. 섬에 살아본 사람은 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태풍은 언젠가 지나가고, 바람도 그칠 날이 온다는 것을. 그러면 누런 황톳물과 뒤집힌 흙더미에서 새 생활이 시작되고, 무너진 담 다시 쌓아올리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웅크린 사내가 바람의 향방을 알 수 없는 집 안에서 두려움에 떠는 것 대신 폭풍 휘몰아치는 밖에서 자연과 마주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근원적 고독에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묻혀낸 변시지의 ‘절도’에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유배 시절에 그린 ‘세한도’가 떠오른다. 검은 갈필과 널찍한 여백, 화면을 차지한 나무 때문이다. 제주의 바람과 흙이 어떻게 화가를 키워내는가도 짐작해볼 수 있다.
변시지 1949년작 ‘여인좌상’. 화가의 초기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소장품 특별전에서 볼 수 있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변시지는 1926년 5월의 햇살이 눈부시던 날 제주 서귀포시 서흥동에서 태어났다. 5남 4녀 중 넷째 아들이었다. 물려받은 농토와 재산을 가진 아버지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일본을 오가며 신학문을 익혔다. 그의 나이 여섯 살이던 1931년, 아버지가 결단을 내렸다. 일본으로 가 개화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14대째 살아온 제주를 떠나 일본 오사카에 정착했다. 소학교 2학년 때 덩치 큰 일본 학생과 오기로 씨름하다 다리를 다쳤다. 오른쪽 대퇴부 관절을 다쳐 그 후 평생 지팡이를 짚게 됐다. 뛰어놀지 못하는 바람에 그림에 매달렸나 보다. 1942년 오사카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친구들은 태평양전쟁에 징집됐지만 그는 다리 때문에 면제였다. 친일이 강요되던 국내 분위기에서도 살짝 비껴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어렸을 적 이름은 ‘변시군’이었는데 이름 뒤에 ‘군’을 붙이는 일본식 호칭 때문에 ‘시군군’으로 놀림 받자 아버지가 배 타고 고향까지 가 개명했다. 그렇게 ‘변시지’가 됐다. 그토록 자식을 끔찍히 아끼던 부친은 조국의 광복을 못 본 채 세상을 떠났다. 해방되던 해 미술학교를 졸업한 변시지는 도쿄로 가 불어를 공부하면서 본격 작가의 길을 걷는다. 오사카에 고무공장을 경영하던 형들이 후원자였다. 1947년 일본 최고 권위의 미술상인 광풍회(光風會) 공모전에 출품한 ‘겨울나무’ 두 점이 입선했고 그해 가을 일본 정부가 주최한 일전(日展)에서 ‘여인’이 입선했다. 인상파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그의 그림을 본 심사위원이 “이 작품을 인정하면 기존 대가들의 그림이 위험하다”고 했을 정도로 참신했다. 급기야 이듬해에는 ‘광풍회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일본 서양화단 최고의 권위인 ‘광풍회’에서 새파란 스물셋 조선 청년이 최고상을 받다니, NHK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화제였다. 김인승과 김원이 입선하고 이인성이 특선했던 전시에서 당당히 최고상을 받은 이 기록은 이후로도 깨지지 않았다. 당시 수상작 ‘베레모의 여인’은 일본 가누마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듬해 도쿄 최정상급 전시장인 긴자의 시세이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이 열렸다. 일본에서 승승장구할수록 화가의 마음에는 갈증과 초조함이 일었다. 민족의식에 대한 자각이었다. 때마침 장발 서울대 미대학장이 강의를 청했다.
변시지 ‘서귀포’. 화가가 고향 제주도로 돌아간 직후인 1977년에 그린 작품이다. /사진제공=제주도립미술관
1957년 11월 변시지는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서울대 교수생활을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서울생활은 우리 것을 통해 한국의 화풍을 개척하는 계기였다. 한국화가들의 해외진출이 붐이던 1970년대에 변시지는 반대로 고향을 향했다. 제주대 초빙이 전환점이 됐다. 오사카로 떠난 후 44년 만에, 오십이 되어 돌아온 고향에서 정체성에 대한 실존적 반성의 시간이 시작됐다. 변시지의 귀국 초반 작업에는 근대 풍경화의 시초인 영국화가 존 컨스터블(1776~1837)의 성실함이 보인다. 컨스터블은 매일 밖으로 나가 풍경을 관찰하고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연의 진실에 접근하려 했다. 서울 시절 변시지는 한옥 처마 밑에서, 고궁 후미진 곳에서 종일 그림만 그렸다. 고궁을 많이 그려 ‘비원파’라 불릴 정도였다. 1965년작 ‘가을의 애련정’은 정자의 기왓장 수까지 실제와 정확히 일치할 정도로 섬세한 화풍이었다. 그러나 고향 제주로 옮겨간 그는 오히려 컨스터블의 동시대 경쟁자였던 J.M.윌리엄 터너(1775~1851)에 더 가깝다.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를 가장 낭만적으로 그린 터너 말이다.
변시지 1986년작 ‘풍파’ /사진제공=제주도립미술관
제주로 돌아와 고뇌하던 어느 날, 하루는 숙취에서 느즈막히 깨서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원색으로 표현된 제주 풍광을 보고는 울렁거림을 느꼈다. 비틀거리며 눈 돌렸을 때, 간밤에 밀어둔 캔버스에서 기묘한 황갈색을 보았다고 한다. 1977년작 ‘서귀포’만 보더라도 모네 같은 인상주의자의 빛 그림자 같은 푸른색이 두드러지는데, 그 후로는 특유의 누런 색깔이 화면 전체를 뒤덮었다. 마침내 ‘변시지풍’이 완성됐다. 화가는 이 황갈색의 바탕색을 제주도의 자연광에서 얻었다고 말하곤 했다. “아열대 태양 빛의 신선한 농도가 극한에 이르면 흰빛도 하얗다 못해 누릿한 황토빛으로 승화된다. 나이 오십에 고향 제주의 품에 안기면서 섬의 척박한 역사와 수난으로 점철된 섬 사람들의 삶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제주를 에워싼 바다가 전위적인 황토빛으로 물들어 감을 체험했다.”
자연을 그리며 색을 버리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 물감을 섞어 누런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먹 같은 검은 선묘로, 감각적으로 대상을 그려간다. 색깔은 파도에 씻기고 형상은 바람에 날아가버린 셈이다. 제주를 그리되 현란한 색채의 유혹과 이상적인 껍데기를 떨쳐내고 순수와 원시의 속살을 그린 이는 변시지가 처음이었다.
“우리 앞에 놓은 하나의 풍경이 제각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풍경이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풍경은 어떤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며 그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세계가 된다.”
변시지 ‘하산Ⅱ’, 1980년대, 캔버스에 유채, 45.5x53cm /사진제공=SK핀크스 골프장
1987년 고향 서귀포에 들어선 기당미술관은 변시지의 외사촌이자 재일기업인 기당 강구범의 호를 땄다. 기당미술관과 제주도립미술관이 변시지의 대표작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SK핀크스 골프장의 포도호텔에서는 ‘해변 돌담 위에 까마귀’를 만날 수 있다. 뭍에서와는 달리 제주에서 까마귀는 길조로 통한다. 돌담 곁에서 풀 뜯는 소와 까마귀들이 바람 그친 뒤의 고요한 평화를 보여준다. 비오토피아에 걸려있는 ‘하산Ⅱ’에서도 변시지 특유의 구부정한 사내와 말, 초가집과 소나무를 볼 수 있다. 멀리 보이는 산과 그 너머의 수평선을 둥글고 선명한 태양이 비추고 있다. 역시나 희망이다.
고향은 떠나온 곳인 동시에 돌아갈 집이다. 변시지가 포착한 실존적 고독이 온 세상을 끌어안는다. 그림에서 바람 냄새가 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변시지 1991년작 ‘섬’ /사진제공=제주도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