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브랜드스토리 (4)포르쉐]히틀러 국민차 개발계획에 참여해 명암

다임러-벤츠 출신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창업주
국민차 성공, 이후 폭스바겐 '비틀' 원형되기도
패전후 감옥행. 아들 손자들이 경영 이어가

포르쉐는 고성능 스포츠카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이른바 회장님들이 타는 차량이 아니라 감성과 고성능 엔진의 조화를 통한 주행 질감을 느끼는 마니아층이 형성될 정도의 프리미엄 스포츠카 브랜드이지요. 가격도 차 한 대 당 수억원이 넘습니다. 그래서인지 포르쉐의 전 세계 판매량을 보면 24만6,375대(2017년 말 기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현대차가 전 세계에서 한 달 동안 판매하는 자동차 규모가 41만4,222대(2018년 6월 기준)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판매량은 글로벌 브랜드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성능 스포츠카라는 이미지로 인해 모든 사람이 한 번쯤 소유하고자 하는 하는 꿈을 꾸게 만드는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포르쉐를 이야기할 때 가정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페르디난트 포르쉐라는 인물입니다.


포르쉐의 창업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쉐(왼쪽)와 그의 아들 페리 포르쉐./사진제공=포르쉐코리아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메르세데스 벤츠의 전신인 다임러-벤츠의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비용 문제로 좌초되자 그는 동료들과 함께 다임러 벤츠를 나와 1931년에 ‘포르쉐 모터&자동차 제조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이미 1900년에 휠 허브 모터를 장착한 전기 자동차를 제작하고 또 가솔린과 전기를 혼합한 파워트레인을 개발,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원형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아들인 페리 포르쉐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포르쉐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페르 포르쉐는 356 N0.1 로드스터라는 자동차 이름에 포르쉐라는 브랜드명을 처음 사용한 것이지요, 페리 포르쉐는 자신의 세 아들에게 차례대로 경영을 맡깁니다.
포르쉐의 2세대 경영인인 페리 포르쉐(왼쪽에서 두번째)와 그의 아들들./사진제공=포르쉐코리아

포르쉐의 2세대 경영인인 페리 포르쉐(왼쪽에서 세번째)와 그의 아들들./사진제공=포르쉐코리

특히 볼프강 포르쉐라는 아들은 이후 포르쉐 AG(Automotive Group) 이사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창업주의 자손들이 경영을 이어갔습니다. 또 아버지 페리 포르쉐의 막내인 볼프강 포르쉐는 할아버지인 페르디난트 포르쉐와 마찬가지로 다임러 벤츠에서 1976년부터 1981년까지 근무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손자인 볼프강 포르쉐. 볼프강 포르쉐는 이사회 회장을 역임했다./사진제공=포르쉐코리아

포르쉐는 이처럼 창업주의 성을 따서 브랜드를 만들고 이 브랜드를 후손들이 가꾸는 형태로 발전해왔습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나치 정권의 악마의 유혹에 빠져들어가면서 후에 고초를 겪게 됩니다. 악마의 유혹은 바로 히틀러가 구상한 국민차 계획 때문이지요. 당시 히틀러는 당시 돈 990 제국 마르크 가격으로 4명의 승객이 탈 수 있는 국민차를 만들기 위해 폭스바겐이라는 회사를 만들게 됩니다. 히틀러는 독일 노동전선( Deutsche Arbeitsfront ) 아래에 둔 폭스바겐의 기술 개발 능력이 부족한 점을 인식하고 바로 페르디난트 포르쉐에게 손을 내민 것입니다. 결국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히틀러의 국민차 계획에 따라 구상된 카데프 바겐에 참여해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 카데프 바겐은 이후 폭스바겐 ‘비틀’의 원형이 됩니다. 아울러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포르쉐와 폭스바겐 모두 무기 생산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전투기 개발에까지 깊숙이 관여하게 됩니다. 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나치 독일의 승리가 예상되면서 포르쉐는 승승장구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미군의 참전으로 연합군이 승기를 잡으면서 결국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22개월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그는 출소 이후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사망해 포르쉐의 1세대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김상용기자 kim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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