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에서]체코 건국 100주년, 프라하의 봄 50주년

문승현 주 체코대사
파시즘 물결 속 민주주의 가치 수호
EU 내 최고 수준 경제성장률 달성
체코인의 자기정체성 강화 노력
'혼돈의 시대' 한국에도 큰 시사점


체코 역사를 보면 숫자 8로 끝나는 해에 국가적으로 큰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30년 종교전쟁이 체코 땅에서 1618년 발생했고 1938년 나치 독일의 체코 침공의 도화선이 된 뮌헨협정이 체결됐으며 1948년에는 체코 공산당의 집권이 이뤄졌다. 그렇다면 2018년은 이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와닿는 것일까.

올해는 체코슬로바키아(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 건국 100주년, 1968년 프라하의 봄 민주화 운동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1989년 벨벳혁명 이후 체제전환 과정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달성했지만 ‘체코를 어떤 국가로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하는 질문은 체코인들에게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중부 유럽에 위치한 체코의 지정학적 특성상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기 위해 자기정체성 확립만큼 중요한 과제가 없다는 인식에서 연유하는 것 같다.



이 질문에 대한 체코인들의 답은 우선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에서 드러난다. 체코는 1989년 공산정권 붕괴 이후 민주화 및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겪으면서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으로서의 자기 위상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부 중·동부 유럽 국가에서 나타나는 권위주의나 비자유 민주주의 흐름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자유·인권 등 민주적 가치를 견지하기 위한 사회적 담론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포퓰리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과거 파시즘의 물결 속에서도 민주주의 가치를 지켜내 ‘민주주의의 섬’으로 불렸던 것처럼 민주적 가치만이, 그리고 이를 지키려는 노력이 유럽의 일원으로서의 체코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길이라는 믿음이 강하다.

둘째, 경제적 역량 강화 없이는 체코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체코인들은 자신들의 산업 기반 및 역량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체코는 1890년대 후반에 이미 자동차를 만들었고 구 소비에트 경제권의 산업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체코는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3명 배출한 바 있고 소프트 콘택트렌즈를 세계 최초로 발명하는 등의 저력을 바탕으로 현재 영국 포함 28개 EU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의 경제성장률, 최저 수준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안드레이 바비시 총리가 이끌고 있는 현 정부는 체코 경제의 도약을 위해 4차 산업혁명 준비, 연구개발(R&D)에 대한 집중 투자, 그리고 ‘디지털 체코(Digital Czech Republic)’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산업국가로서의 위상 재정립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연장선에 있다.

셋째, 많은 외침과 주변국에 의해 지배를 받았던 역사 속에 체코인들은 문화적 일체감을 유지함으로써 자기정체성을 발전시켜 왔다. 인구 1,000만명 정도 규모의 크지 않은 나라인 체코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의 흔적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곡가인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나 아르누보 화풍을 이끈 알폰스 무하의 ‘슬라브 에픽’, 그리고 문학 분야에서의 카렐 차페크, 보후밀 흐라발 등의 작품은 체코인으로서의 일체감을 유지시켜 주는데 큰 기여를 했다. 우리는 흔히 낭만적인 기질의 사람들을 보헤미안이라고 표현한다. 체코의 주요 지방 중 하나가 보헤미아인데 이러한 낭만적·낙관적인 체코인들의 기질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의 국민적 일체감을 유지해주고 있는 또 하나의 비결이 아닌가 싶다.

체코나 우리의 경우처럼 인근국으로부터의 위협이 생존과 번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적 특성을 가진 국가의 경우 자기정체성을 제대로 확립·유지해 나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특히 혼돈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오늘날 민주적 가치, 경제적 번영, 그리고 문화적인 일체감은 우리가 과연 어떤 나라로 발전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중요한 구성 요소가 돼야 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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