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두라스에서 출발해 미국으로 향하는 대규모 캐러밴이 지난 21일(현지시간) 멕시코 치아파스주 타파출라를 지나고 있다. /타파출라=로이터연합뉴스
“이 거대한 무리를 모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굶주림과 죽음, 두 가지가 유일한 원동력입니다.” (인권단체 푸에블로 신 프론테라스 소속 이라네오 무지카)
지난 13일(현지시간) 온두라스 북부 도시 산페드로술라에서 떠난 캐러밴이 종착지로 삼은 텍사스주 맥앨런까지 거리는 2,458㎞(구글맵스 기준). 산페드로술라에서 멕시코 국경도시 타파출라까지 677km, 타파출라에서 맥앨런까지 다시 1,781km를 걷고 또 걸어야 한다. 하루 12시간씩 42일, 총 504시간을 걷는 고난의 여정이지만 캐러밴의 규모는 줄어들기는커녕 불어나고만 있다. 25일 현재 가야 할 길은 아직 1,600여㎞나 남았지만 수천명의 인간띠 행렬은 ‘흩어지면 죽는다’는 일념으로 더 단단해지고 있다.
‘숙박·취사시설을 갖춘 트레일러’라는 뜻의 캐러밴은 미국 국경으로 향하는 중미인 행렬을 가리킨다. 온두라스·과테말라·엘살바도르 출신들이 모이지만 온두라스인이 10명 중 8명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이 가운데 5~10%는 어린이들이다.
캐러밴은 해마다 성 주간(Holy Week·부활절 일요일 전의 일주일)에 맞춰 연례적으로 모집되고 이외에도 크고 작은 무리가 생겨난다. 누가 주도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주동자 중심으로 100~200명이 짐을 꾸리면 입소문을 타면서 수백·수천명이 합류한다. 미주 인권단체 ‘푸에블로 신 프론테라스(국경 없는 사람들)’는 이들 간의 소통을 도맡으며 지난 15년 동안 캐러밴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도록 도왔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수개월·수년 전부터 이민을 꿈꾸던 이들이 페이스북·TV·왓츠앱에 올라오는 캐러밴 소식을 보고 떠날 결심을 한다”고 설명했다.
캐러밴의 목표는 둘 중 하나다. 멕시코 북부까지 무사히 도착한 뒤 몰래 미국 국경을 넘거나 망명신청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도착하더라도 까다롭고 오랜 시일이 걸리는 미국의 망명심사라는 더 큰 장벽을 넘어야 한다. 망명심사에서 탈락하면 고국으로 추방당한다. CNN에 따르면 지난해 캐러밴에 참여한 200명 가운데 올해 4월까지 망명신청이 받아들여진 이는 단 3명에 불과했다.
캐러밴은 살아남기 위해 몰려다닌다. 세렝게티 들소들이 맹수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무리를 짓듯 캐러밴도 갱단이나 마약쟁이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떼로 움직이는 것이다. 미 워싱턴라틴아메리카연구소(WOLA)는 “고액의 밀수금을 내지 않고 멕시코를 통과하려면 살인·강도·납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한다”면서 “캐러밴은 합리적으로 내린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4월 1,000명을 넘긴 캐러밴은 이달 들어 7,200명(유엔 집계, 22일 기준)에 육박했다. 멕시코 언론은 이번 캐러밴 행렬이 3개이며 총 1만4,000명이 북진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올해 유독 캐러밴이 급증한 첫 번째 이유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중미국가들의 내정불안에서 찾을 수 있다. 온두라스에서는 지난해 11월 재집권한 우파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 대통령이 부정 개표를 주장한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면서 최소 30명이 사망했다. 여기에 대규모 홍수가 겹치고 치안도 불안정해지자 이민 브로커에 뒷돈을 줄 여력이 없는 대다수가 캐러밴에 합류했다. WOLA는 “멕시코를 지나 미국에 가려는 대다수 이민자들에게는 선택지가 두 개뿐이다. (브로커) 밀수업자에게 1만달러(약 1,140만) 이상을 건네거나 거대한 무리의 일원이 돼 떠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멕시코·온두라스 등 중미 정부들의 방치가 캐러밴에 일조했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과 국경을 맞댄 멕시코는 캐러밴 행렬을 막았다가 공연히 덤터기를 쓸까 우려하고 있다. 캐러밴이 중도 포기하거나 멕시코에 남을 경우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이다. 올 4월에 미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로 떠났던 1,200명의 캐러밴 가운데 최종적으로 국경에 도달한 사람은 200명뿐이었으며 이번 캐러밴에 소속된 1,699명은 멕시코에 난민신청을 했다.
다음달 6일 미 중간선거를 앞둔 민감한 시기에 캐러밴 사태가 불거지면서 미국 사회에서는 캐러밴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이 한창이다.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민주당에 내줄 위기에 처한 공화당과 보수매체들은 캐러밴의 배후에 좌파가 있다는 ‘배후설’을 제기하고 있다. 진보적 억만장자 조지 소로스가 캐러밴에 돈을 대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미 보수매체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인 로라 잉그레이엄은 트위터에서 “캐러밴 한 명이 국경을 넘으려면 7,000달러가 필요하다. 온두라스의 1인당 소득은 2,300달러에 불과하다. 누가 캐러밴에 자금을 대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도 “온두라스 대통령으로부터 캐러밴이 베네수엘라 좌파정부의 자금지원을 받는다고 들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보수진영의 맹공이 이어지자 뉴욕타임스(NYT)는 사설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공화당 선거 후보들이 캐러밴을 선거 이슈로 내세우고 이민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40년 만에 최저로 떨어졌던 불법이민자 수가 올 들어 증가세를 보이자 과테말라·온두라스·엘살바도르에 지급하는 연간 지원금 5억달러를 삭감하겠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정부는 또 캐러밴을 막기 위해 최대 1,000명의 현역 군인을 국경지대에 배치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같은 조치가 캐러밴을 막는 데 근본적인 처방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불법이민자 한 명당 체포·기소·추방비용으로 수천달러가 들어간다는 점을 생각할 때 중미인의 모국 정착을 돕는 지원 프로그램이 오히려 비용 대비 효율적”이라면서 “지원금이 끊기면 더 많은 캐러밴이 몰려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