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청와대 영빈관에서 취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혁신성장 전략회의’를 갖고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혁신성장은 신산업·신기술에 대한 규제혁신이 필수다. 민간의 상상력이 낡은 규제와 관행에 발목 잡혀서는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 2017년 11월28일 혁신성장전략회의)
지난해 11월 청와대에서 혁신성장전략회의가 열렸다. 정부 출범 반년이 지난 시점, 소득주도성장만 보일 뿐 혁신성장이 실종됐다는 지적이 쏟아질 때였다. 이를 의식한 듯 문 대통령은 ‘혁신성장의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그 핵심으로 꼽히는 규제개혁 의지를 거듭 강조했다. 추진과제 발굴을 위한 현장방문도 주문했다.
그리고 1년이 다 돼가는 현재 인터넷전문은행법만 간신히 수정돼 통과했을 뿐 달라진 건 없어 보인다. 스타트업 업계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기에 앞서 괜한 갈등이나 논란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부터 따지는 게 현실이다. 공유경제의 상징인 우버나 에어비앤비 같은 승차·숙박 공유 모델은 기득권 이익단체의 반발과 미온적인 정부 대응 앞에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국회에 묶인 규제 완화 법안은 밖으로는 시민단체와 노동계의 반대와 안으로는 여권 강경파의 외면에 혁신성장은 아직도 ‘실종’ 상태다.
◇70회 대책에도 뽑히지 않는 붉은 깃발=정부 출범 이후 문 대통령이나 김동연 기획재정부 장관 겸 부총리가 주재한 ‘굵직한’ 회의는 무려 32차례에 이른다. 관련 대책 발표도 70회에 달한다. 대통령만 보더라도 지난해 11월 혁신성장전략회의를 시작으로 올해 1월 규제혁신 토론회, 5월 혁신성장보고대회 등 2~3개월마다 ‘혁신성장’과 ‘규제혁신’을 외쳤다. 정부는 회의 때마다 갖은 비유를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영국의 자동차 산업을 병들게 한 붉은 깃발을 예로 들었고 김 경제부총리는 육상에서 캥거루 출발법을 처음 사용한 사례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사뿐이었다. 붉은 깃발은 뽑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하게 박힌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스타트업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강조하니 처음에는 잘되나 싶었지만, 매번 바뀌는 건 없었다”며 “벌써 정부가 출범한 지도 중반에 가까워지는데 임기 내 변화가 있을지 의아스럽다”고 비판했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4중 장벽’=혁신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저항의 출발은 기득권이다. 반발이 큰 승차공유(카풀)와 숙박공유·원격의료 등을 살펴보면 택시 업계와 숙박 업계, 의료계가 똘똘 뭉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와 노동계, 여권 강경파 등도 큰 산으로 꼽힌다. 참여연대는 지난달 정기국회 개시와 함께 정부가 규제 완화를 위해 내건 입법안에 공식 반대성명을 냈다. 참여연대가 내건 4대 반대과제 중 은산분리(산업자본의 은행지분 보유제한)를 완화하는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과 규제 샌드박스 3법은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지만 규제프리존 특별법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서발법), 네거티브 규제를 골자로 하는 행정규제기본법은 여전히 국회 계류 중이며 통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정부 내부의 견고한 장벽도 있다. 부처 간 이기주의가 만연한 가운데 보통 1~2년가량만 해당 업무를 맡은 뒤 보직을 바꾸는 인사 특성과 특별한 보상이 없는 인센티브 체계는 관료로 하여금 모험적인 개혁을 시도할 의지를 꺾는다. 갈등이 첨예한 안건은 최대한 보류하며 버티다 후임자에게 과제를 넘기는 이른바 ‘폭탄 돌리기’다.
◇치고 올라가는 경쟁국…골든타임 놓치는 한국=중국은 신산업은 일단 파이부터 키워놓고 이후 규제를 한다. 반면 우리는 성장의 뿌리가 채 내리기 전에 규제부터 꺼낸다. 이태희 벅시 대표는 “국내에서 모빌리티 사업을 하려면 자기검열 때문에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현실을 지적했다. 답보 상태인 혁신성장이 가져오는 부작용은 고스란히 시민들이 떠안아야 한다. 한국 승객들은 최고의 정보통신기술(ICT) 기반에도 최적의 교통수단을 찾아줄 솔루션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저렴하고 쾌적한 숙박업소를 찾을 수 있는 에어비앤비의 혜택을 내국인(도심 숙박)은 누리지 못하고 거동이 불편한 고혈압 환자들이 처방전을 타러 몇 시간씩 걸려 병원을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 기술 발전은 기득권 교체를 수반했다”며 “특정 이익집단만 계속 보호받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호소했다.
더 큰 문제는 세계적 흐름에 한국만 소외된 채 산업의 활력이 떨어져 간다는 것이다. 성장률은 내리막길을 걷고 일자리는 줄어들며 국민 삶의 질 전반이 저하될 수 있다. 이필상 서울대 초빙교수는 “전 세계가 치열히 경쟁하는데 한국은 일자리를 걱정하면서 규제 완화에는 소극적”이라며 “모든 주체가 이념을 떠나 위기 속에서 경제의 새로운 동력을 창출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진혁·빈난새기자 libera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