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임 실장이 비건 대표에 북미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달라고 당부했고 비건 대표는 한국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면담에는 우리 측 권희석 청와대 안보전략비서관과 미국의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앨리슨 후커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한반도 보좌관, 케빈 킴 비건 대표 선임보좌관이 배석했다. 비건 대표가 한국의 국가안보정책을 총괄하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에 앞서 임 실장을 만난 것은 이례적으로, 미국이 요청해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미국이 비핵화 없는 남북 경제협력에 경고를 보내왔다는 점에 비춰 미국이 이 같은 우려를 임 실장에 직접 전달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이날 ‘한국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다’는 브리핑을 고려할 때 교착 상태인 북미 협상에 한국이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비건 대표는 30일 정 실장과 조명균 통일부 장관을 만날 예정이다.
비건 대표는 이에 앞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 본부장과 만나 “우리는 한반도에서 70년간의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기 위해 북한의 ‘완전하고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비핵화(FFVD)’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며 북한의 비핵화 전 경협 등 대북제재 완화는 안 된다는 미국의 입장을 우리 정부에 우회적으로 전달했다.
이런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재차 북미 협상 속도 조절론을 강조했다. 그는 27일(현지시간) 일리노이에서 열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정치유세에서 “핵실험이 없는 한 비핵화가 얼마나 오래 걸리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의 해결 속도가 느리다는 비판에 대해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게 좋은 일”이라며 “내가 오기 바로 직전 사람들이 정말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핵 재앙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고 반박했다.
이는 FFVD를 위한 핵사찰 등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사실상 장기전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기 싸움에서 주도권을 유지한 채 실질적인 성과를 내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포석으로 보인다. 또 ‘연내’라는 시간의 족쇄를 스스로 풀어 북핵 협상 때 운신의 폭을 넓히는 동시에 연내 종전선언과 대북제재 완화 등 문재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과속’을 우회 압박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도 취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유세에서 “우리는 북한에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김 위원장을 만났다는 것 한 가지뿐”이라며 북한의 비핵화 전까지 제재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이에 따라 영변 핵 시설 사찰과 연내 종전선언 등 비핵화 시계는 오는 11월6일 미 중간선거 이후 본격적으로 돌아갈 것으로 관측된다.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고 미국이 제재완화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서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북한과의 경협도 난관에 봉착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 장관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이달 하순께 추진하기로 한 경의선 철도 북한 현지 공동조사의 지연 이유에 대해 “미국 측과 부분적으로 약간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다”고 밝혀 제재완화와 관련해 한미 간의 입장 차가 있음을 시사했다.
/박우인기자 wipar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