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처럼 아득한 기억, 캔버스서 선명해지다

명품 브랜드북 출판업체 '애술린'
미술전문 '애술린 갤러리' 재오픈
작품속 사유·세대적 경험 녹여낸
조덕현·정광화, 30일까지 2인전

조덕현 ‘문희 오마주’

19세기 영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커피 테이블 북(Coffee Table Book)’이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응접실 탁자 위에 올려진 책을 가리킨다. 집이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자연스럽게 눈길을 끄는 탁자 위 책이 주인장의 취향과 품격을 대변한다는 속뜻을 품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단어다. 이 점에 착안해 책에 명품 개념을 더한 출판 브랜딩 회사가 바로 ‘애술린(ASSOULINE)’. 프랑스 회사로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루이비통·까르띠에 등 글로벌 명품 브랜드 대부분의 브랜드 북을 제작했다. 책 케이스를 퀄팅(누빔) 가죽으로 제작해 ‘샤넬’의 정체성을 한눈에 보여줬고, 무명에 가깝던 ‘고야드’를 단번에 스타로 만든 게 바로 애술린이었다. 설화수, MCM, 현대자동차 등도 애술린에서 브랜드 북을 출판하면서 글로벌 명품 시장에서 존재감을 확인시켰다.

지난 2012년 아시아 명품시장을 겨냥한 전초기지로 한국을 택해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에 프래그십 스토어를 연 애술린이 미술 전시를 위한 ‘애술린 갤러리’를 새롭게 단장해 공개했다. 지난달 30일 개막한 기획전은 현대미술가 조덕현과 정광화의 2인전으로 전시 제목은 ‘기억은 안개처럼(Mists of memories)’. 각각의 사유와 세대적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두 작가의 작업이 갖는 ‘기억’이라는 접점이 두드러지는 전시다.


조덕현 ‘할리우드 에픽’

과거의 사진과 섬세한 그림을 결합한 ‘사진그림’으로 유명한 중견작가 조덕현은 ‘할리우드 에픽(Hollywood epic)’ 연작 25점을 선보였다. 무성영화부터 1950~60년대 흑백영화까지 20세기 할리우드 영화의 장면들을 소재로 삼았다. ‘카사블랑카’ ‘로마의 휴일’ ‘안네 카레리나’ ‘애수’ ‘젊은이의 양지’ 등의 영화와 버스터 키튼, 게리 쿠퍼, 험프리 보가트, 그레이스 켈 리, 오드리 헵번, 그레타 가르보, 릴리안 기쉬, 베티 데이비스, 토니 커티스, 비비안 리, 캐롤 롬바드 등의 배우들이 작품으로 되살아났다. 조덕현 작가는 “현실을 모방한 초창기 영화의 장면들이 모방에 모방을 거쳐 정형화되었는데, 거꾸로 그것을 삶으로 모방하는 작금의 현실이 품은 아이러니에 대한 얘기”라며 “내면화된 문화적 기억이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거쳐 발화하는 과정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더 나아가 고정되지 않고 유동하는 기억의 문제에 대해 짚고자 한다”고 밝혔다. 특히 “그 시절 우리가 사모했던 여배우”라고 칭한 문희를 주인공으로 한 ‘문희 오마주’ 연작은 시간을 초월한 환상과 동경을 펼쳐 보인다.

정광화 ‘팔레트’

정광화는 ‘팔레트’라 불리는 대형 설치작업과 조각 5점, 사진 8점 등을 전시했다. 침대보다 훨씬 더 큰 사각형의 나무상자인 ‘팔레트’ 위에는 하얀 석고가루가 가득 채워져 있는데 마치 가운데가 시간의 무게로 푹 파인 것처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얕아진다. 가운데는 분지처럼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이 중심부에서 화산 분화구에서 연기가 솟듯 수증기가 차오르고 있다. 수증기를 내리비추는 하얀 백열등은 신비로움을 고조시킨다. 관람자가 선 채로 작품을 내려다볼 수 있지만, 약 70㎝인 작품 높이에 맞춰 살짝 허리를 구부리거나 앉는다면 새벽 연못에 피어오르는 안개에 빠져드는 것 같은 신비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전시는 11월30일까지.

애술린은 명품 브랜드 외에도 앤디 워홀 등의 아트북 등을 제작했으며, 박서보와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를 책으로 소개하는 등 예술분야에서도 명가(名家)의 저력을 보여왔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사진제공=애술린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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