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종교적·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을 내린 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오승헌(가운데)씨가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법원이 종교적 신념과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사람을 형사처벌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양심적 자유가 국가 안전보장이라는 대전제보다 가치가 덜하지 않다는 이유로 14년 만에 판단을 뒤집었다. 하지만 아직 대체복무제 시스템도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양심의 자유에 대한 기준 역시 불분명해 징병시스템의 혼란을 부를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1일 현역병 입영을 거부한 혐의로 기소된 ‘여호와의증인’ 신도 오승헌(34)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대법관 9(무죄) 대 4(유죄) 의견으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창원지방법원 형사항소부로 돌려보냈다.
무죄 의견을 낸 9명의 대법관 가운데 다수 의견을 차지한 8명은 “양심적 병역거부는 병역법 제88조 제1항에 규정한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들 대법관은 “자유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지만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인정해야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며 “형사처벌 등으로 병역의무를 강제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거나 본질적 내용에 위협이 된다”고 판시했다. 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를 국가가 언제까지나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다”며 “그 신념에 선뜻 동의할 수 없더라도 이제 이들을 관용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병역의무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개인의 인격적 가치를 파멸시키면서까지 강제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다. 국방의 의무가 양심 실현의 자유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한 지난 2004년 전원합의체 판단과는 상반되는 논리다. 특히 개인의 신념을 바탕으로 병역제도를 바꾸라고 요구하거나 국방 의무를 부정하는 등 적극적인 행위가 아니라 병역의무에 응하지 않는 ‘소극적 양심실현의 자유’는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이 판단의 핵심이다. 이동원 대법관의 경우 “국가 안전보장에 우려가 없는 상황을 전제한다”며 별개 의견을 냈지만 무죄 취지 파기환송이라는 결론은 같았다.
반면 이날 퇴임한 김소영 대법관을 비롯해 조희대·박상옥·이기택 대법관 등 4명은 유죄 취지로 강력하게 반대 의견을 냈다. 이들은 “병역법 제88조 제1항의 정당한 사유는 당사자의 질병이나 재난 발생 등 객관적인 사정에만 한정된다”며 “종교나 가치관 등 주관적 사정은 정당한 사유에 해당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중한 안보 상황, 병역의무 형평성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 요청 등을 감안하면 양심적 병역거부는 인정될 수 없다”며 다수 의견을 비판했다.
이번 대법원 취지대로 2심이 다시 치러진 뒤 판결이 확정되면 현재 법원에 계류 중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도 무더기 무죄 판결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병무청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으로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총 989명이다. 지난달 31일 기준으로 상고심에 올라온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만 227건에 달한다. 다만 이미 형을 확정받은 경우는 재심이나 보상 등 구제를 받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지난달 25일 문 대통령에게 이들에 대한 특별사면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아울러 현재 입영·집총 거부에 따른 병역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된 22명 역시 대거 무혐의 처분이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의 양심 판단 기준을 애매하게 표현해 앞으로 상당 기간 논란이 예상된다. 다수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양심 검증 작업의 공을 검찰로 돌렸는데, 당장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들 사이에서도 “양심을 심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편 오씨는 이날 대법원 판결 직후 “현재 계류 중인 재판에서도 전향적인 판결이 나오기 바란다”며 “병역기피의 수단으로 남용될 수 있다는 국민의 우려를 없앨 수 있도록 성실히 (대체)복무하겠다”고 말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