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 ‘가을’. 1961년에 198x260cm 캔버스에 그린 대형 유화. 노랑과 빨강이 혼합돼 무르익은 가을 분위기를 전하는 그림 안에서 여인의 모습도 찾아낼 수 있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제목마저 ‘가을’이다. 요즘처럼 무르익은 가을날 공원에서, 좋아하는 사람을 눕혀 놓고 노랗고 붉은 낙엽을 잔뜩 뿌려 파묻어본 적 있으려나. 리처드 기어와 위노나 라이더가 나란히 걷던 영화 ‘뉴욕의 가을(Autumn In New York)’에 나오는 그런 가을 풍경처럼. 과감하고 독자적인 화풍으로 유명한 김흥수(1919~2014)가 마흔 두 살에 그린 ‘가을’이다. 샛노란 금가루와 쥐어짠 석류즙을 흩뿌렸나 싶은 첫인상이 들 정도로 색채가 강렬하다. 이 ‘가을’은 붓질로 점 찍듯 그린 작품이다. 점도 그냥 둥근 것이 아니라 일정하지 않게 길쭉한 모양인지라 마치 어그러진 타일을 요리조리 짜 맞춰 완성한 퍼즐 같기도 하다. 가까이 눈 들이대고 보면 흰색, 노란색, 분홍색, 붉은색이 이리저리 엮인 색실처럼 맞물려 있다. 그 덕에 도톰하고 푹신한 가을용 스웨터 같은 온기와 정감이 그림을 꽉 채운다. 하지만 김흥수가 누구인가, 여성 누드화로 유명한 정열의 화가다. 그림에서 세 걸음 물러서 전체를 보면 그 안에 숨은 두 여인을 찾아낼 수 있다. 어느 가을날 뒹굴며 놀던 여인을 낙엽 아래, 그림 속에 꽉 묶어둔 모양이다. 가을 한가운데를 차지한 여인은 흰 치마 아래로 무릎 세워 앉은 채로, 좀 더 농염한 오른쪽 여인은 비스듬히 누운 채로 떠나는 가을과 가버린 사랑을 음미하는 중이다.
김흥수 ‘성에 눈 뜬 소년’ 1991년작.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김흥수는 농염한 여체(女體)의 표현으로 유명하고, 43세 연하 부인과의 뜨거운 러브스토리로 더욱 유명하다. 요절한 반 고흐가 예술가를 ‘비운의 천재’로 각인시켰다면 김흥수는 한국에 ‘예술가는 기인(奇人)’이라는 고정관념을 뿌리내리게 한 데 일조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바람에, 그의 사랑이 종종 작품보다 먼저 부각되고 편견을 갖게 하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자자한 여성편력 속에서 왕성하게 작품을 생산한 피카소가, 그나마 김흥수의 변호인인 셈이다.
“나는 일생동안 누드를 많이 그렸지만 그것은 단순히 여인의 피부, 누드의 표피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누드, 즉 희로애락을 가진 여인의 절실한 감성을 그린 것이다. 한 여성을 통해 들여다 본 환희와 절망, 허무와 끝없는 욕망, 그것이 나의 예술에 들어 있는 독특한 세계다.”
김흥수는 1919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함흥 군수를 지냈으니 유복했다. 그는 함흥고등보통학교 4학년 때 전국 규모의 미술전이던 ‘조선미술전람회(鮮展·선전)’에서 상을 받는다. 그 때 나이 16세. ‘밤의 실내 정물’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벽에 걸려있는 죽은 꿩을 부드러운 인상파 화풍으로 그린 것인데,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미술 천재로 이름이 났고 화가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시절 대부분이 그랬듯, 어쩌면 지금도 여전한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화가는 빌어먹는 짓”이라고 하는 아버지 앞에 “물에 빠져 죽을 결심”으로 맞서고야 일본 유학을 허락 받았다. 도쿄 가와번다 미술학교를 거쳐 동경미술학교에 진학했다. 식민지 치하에서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던 그는 1944년 대대적인 학도병 징집을 거부하며 귀국했다. 전쟁은 사람도, 세상도, 그림도 변하게 했다. 1955년 프랑스로 떠났고, 해방 후 파리 유학파 미술가의 선두에 그가 섰다. 김흥수의 1954년작 ‘한국의 봄’은 세세하게 표현된 인물이 등장하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이다. 물론 들판에 앉고 누워 봄을 즐기는 십여명의 인물 대부분이 고운 소녀와 여인들이라는 점은 ‘여성을 사랑하는’ 김흥수의 일관성이지만. 그러던 그림이 프랑스로 간 1956년에는 큐비즘처럼 조각난 형태로, 그 다음 해인 1957년에는 쇠라 등의 후기 인상파 그림처럼 윤곽선없이 배경과 혼연일체되는 점묘로 급격히 변화한다. 큼직하던 조각조각이 붓질로, 점으로 작아지더니 색색의 알갱이가 빻아놓은 다이아몬드 가루처럼 빛을 발산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래서 눈부시다. 흩어진 색들이 제각각 발광하고 난반사하는 보석들이 된 것 같은 장식적 효과가 클림트를 떠올리게도 한다. 한 번은 일본 순회전에서 김흥수의 작품 ‘미륵불’을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일본 여인이 사 갔다. 시력을 거의 상실해 부축을 받아 전시장에 온 그녀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이 그림만 보인다”고 했다 한다. 그렇게 빛나는 그림이었음을 전하는 일화다.
김흥수 ‘파천’ 1989년작. /서울경제DB
파리 생활 후 1961년 귀국해 잠시 ‘서울시대’를 보낸 김흥수는 1967년 미국 펜실베니아 무어 미술대학 초빙교수로 떠난다. 그리고 미국에서, IMF미술관 개인전을 앞둔 1977년 7월 7일 그 유명한 ‘조형주의 선언문’을 발표한다. 일명 ‘하모니즘 선언’으로도 불린다.
“음과 양은 서로 상반된 극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 어울리게 될 때 비로소 ‘완전’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추상미술의 등장 이후 세계의 화단은 구상주의와 추상주의가 서로 반목적인 상극을 이루어 왔다. …음과 양이 하나로 어울려 완전을 이룩하듯 사실적인 것과 추상적인 두 작품 세계가 하나의 작품으로 용해된 조화를 이룩할 때 조형(造型)의 영역을 넘은 오묘한 조형(調型)의 예술세계를 전개하게 된다. 극에 이른 추상의 우연적 요소들이 사실표현의 필연성과 조화를 이룰 때 그것은 더욱 넓고 깊은 예술의 창조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1991년작 ‘성에 눈 뜬 소년’은 고양이처럼 눈을 치뜨고 야릇하게 이글거리는 욕정을 보여주는 그림 소년의 표정에서 한 번, 그리고 너무나 직설적인 그 제목에서 또 한번 미소 짓게 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그림 두 폭을 합친 형식인데, 왼쪽이 소년의 얼굴이라면 오른쪽은 녀석의 속마음인 셈이다. 김흥수는 이런 방식으로 구상과 추상의 조화를 줄기차게 추구했다. 화가의 눈에 보이는 모델을 구상화면에 그리는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모델의 정신세계는 추상화면에 그려 그 둘을 조화시킨 것이 그만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파리 룩상부르그미술관과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 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지박물관 등에서 한국인 최초로 전시를 열며 세계의 인정을 ‘먼저’ 받았다.
의외로 김흥수는 술·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멋으로 파이프를 물고 흰 구두에 흰 양복을 즐겨 입었으며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일은 거의 없으나 춤은 끝없이 추는, 그런 낭만파였다. 김흥수의 마지막 여인이었던 장수현(1962~2012) 전 김흥수미술관장은 원래 그의 미술대학 제자였다. 둘은 1992년 부부가 됐다. 김흥수가 1980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완성한 ‘자화상’을 두고 부인은 “시대가 다른 3가지의 얼굴을 모아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킨 다원적인 작품이다. 왼쪽 화폭의 70대 얼굴은 구상기법으로, 오른쪽은 50대의 얼굴을, 그리고 그 아래의 어린시절의 모습은 추상기법으로 각기 다른 색감과 질감으로 조화시키고 있다. 어린 시절은 얼기설기 짜여진 마대 위에 희미하게 표현하고 초록색은 초목이 자라듯 커가고 있는 시절을 상징한다. 성인이 되어 어렴풋한 기억으로 그려진 호기심 어린 어린이의 표정과, 두꺼운 질감에 약간 옆으로 돌린 50대의 얼굴은 빨강색의 얼굴과 하얀색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은 재밌게도 눈코입을 그리지 않았는데도 작가의 모습이 그대로 느껴진다. 70대의 얼굴은 수염까지 기르고 초연하고 담담하게 삶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며, 양옆의 색동처리는 지나온 작가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고 적었다. 여러 책을 뒤져봤지만 그 어떤 평론가도 김흥수의 작품을 이토록 상세하고 정확하면서도 아름답게 설명한 적 없다. 아마도 둘의 사랑은 욕정이라기 보다는 지음(知音)이지 않았을까. 한참 어린 아내가 먼저, 난소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부인의 1주기를 회고전으로 기억한 자리에서 “장현수가 보고싶다”며 흐느꼈다. 김흥수는 2년 후 자신의 그림을 자기보다 더 잘 이해하고 알아봐 주는 그녀를 따라 떠났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림으로 남겨보고픈 가을이 저물어간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