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신성일이 지난달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연합뉴스
한국 영화계의 ‘큰 별’이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국민배우’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25분 폐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1세.
신씨측 관계자는 이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께서 4일 오전 2시 반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故)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전날 오후 한때 고인이 별세했다는 소식은 오보로 전해졌으나, 다시 위중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고 몇 시간 뒤 숨을 거뒀다.
고인은 1960∼197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대배우였다. 본명은 강신영이었으나 고(故)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 ‘신성일’을 주로 사용했다. 이후 본명을 표기해야 하는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앞두고 예명을 살려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나 생후 사흘 만에 부모와 함께 대구로 이사했으며 1956년 경북고를 졸업하고 1966년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93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1997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2000년 경희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맨발의 청춘’(1964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을 남기며 스타 자리에 올랐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다수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역임했다.
영화계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자유한국당 강석호 의원이 그의 조카다.
고인의 생전 마지막 공식 활동은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이었다.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함께 레드 카펫을 밟았다.
영화계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화인장을 거행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영화인 단체 대표들이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지상학 회장과 배우 안성기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는 방안이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 당대 최고의 여배우 부인 엄앵란 씨와 장남 석현·장녀 경아·차녀 수화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다. /김경훈기자 styxx@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