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전후에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서(盟誓)를 같이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어떻소.”
항일 운동에 매진하던 청년 안중근(1879~1910·사진)은 1909년 2월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함께하는 동지들에게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100명이 넘는 부하들을 이끌고 국내 침투를 단행한 진공 작전에서 참패하고 러시아 연해주로 돌아온 지 한 달쯤 지난 무렵이었다. 안중근은 김기룡·백규삼 등 11명의 동지들과 모여 왼손 약지를 끊고 손가락에서 흘러내린 피로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는 글자 넉 자를 태극기에 큼지막하게 썼다. 진공 작전 실패에 대한 반성으로 결성한 ‘단지(斷指) 동맹’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1909년 10월26일)이라는 민족사의 대사건으로 이어졌다.
러시아 연해주의 크라스키노시(市)를 찾은 한국인 방문객들이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으로 치면 읍 단위 규모에 해당하는 연해주의 크라스키노시(市)로 가면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의 서릿발 같은 민족의식을 기리는 ‘단지 동맹비’를 만날 수 있다. 기념비는 높이 4m, 폭 1m 정도의 큰 비석과 높이와 폭이 각각 1m 정도인 작은 비석으로 나뉜다. 애초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지난 2001년 10월 크라스키노의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에 단지동맹 기념비를 처음 세웠으나 강물이 범람하면서 자주 물에 잠기고 현지인들에 의해 훼손되는 사례도 발생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 왔다. 검은색의 높다란 비석은 두려움 없이 일제에 맞섰던 독립운동가들의 결기를 품은 듯 하늘로 당당히 치솟아 있었다. 비석 한복판에는 약지가 잘려나간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엷은 회색빛의 작은 비석은 불꽃 같기도 하고 눈물 같기도 한 모양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사형 집행으로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 전까지 연해주를 주 무대로 삼아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간 안중근은 1909년 10월 하얼빈에 잠입해 이토 히로부미 사살하기까지 생애 마지막 2년을 러시아에서 보냈다. 1908년 의병 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해 무장 투쟁을 시작한 곳도 연해주였다. 이토를 저격한 후에는 한국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레!(대한만세!)”라고 외쳤다.
러시아 연해주의 크라스키노시(市)에 자리 잡은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
안중근은 불과 31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와중에 그의 항일 노선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원래 안중근은 무장 투쟁론자가 아니었다. 1905년 중국 상하이에서 만난 프랑스인 신부(르 각)로부터 애국 계몽에 대한 신념을 얻은 그는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와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우고 교육 사업에 전념했다. 그랬던 안중근의 삶에 변화가 몰아친 것은 1907년 아버지 친구인 김진사를 만나면서부터다. 김진사는 안중근을 향해 “긴급한 시국에 촌구석에서 교육 사업을 벌이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100만 조선인이 있는 연해주와 간도 지역으로 나가 현실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말을 들은 안중근은 의병 항쟁의 결심을 굳히고 주저 없이 두만강을 건넜다.
이토 사살로 감옥에 갇힌 이후에도 독립을 향한 그의 기개와 결기는 굽힘이 없었다. 안중근은 “무죄인 나에게 감형을 운운하는 것은 치욕”이라며 항소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이토는 한일 친선을 저해하고 동양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이다. 때문에 나는 그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결연히 외친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안중근의 단지동맹비를 마주하며 그의 고결했던 생에 짙은 감상에 젖어 슬쩍 눈물이 솟으려는 찰나, 기자는 안 의사의 어머니가 보낸 마지막 편지에 담긴 죽비 같은 문구가 문득 떠올라 정신이 번쩍 깬다.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아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다.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孝)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모두의 분노를 짊어진 것이다.” /글·사진(크라스키노)=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