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오른쪽)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8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04년 12월31일 이헌재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청와대에 사표를 냈다. 그해 2월에 임명됐으니 10개월 만이다. 부동산 세제를 두고 청와대 정책실과 크게 맞붙었던 후다.
이 전 부총리는 사사건건 참여정부 ‘386’과 충돌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와 공직자 주식 백지신탁, 종합부동산세 등 개혁정책이 불쏘시개였다. 주택금융공사 사장 인사도 청와대의 반대에 뜻대로 못했다. 이 전 부총리는 ‘386’을 겨냥해 “경제를 못 배웠다” “요즘은 진짜 시장경제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같은 발언도 했다. 그는 “청와대 참모진과 죽이 척척 맞아 돌아가도 시간이 부족할 판국이었다”며 “그런데 건건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정책에 숨통이 막힌 것 같아 답답했다”고 회고했다.
이르면 9일 경질될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두고 마지막 모습까지 이 전 부총리 때와 닮았다는 해석이 나온다. 최저임금과 혁신성장에서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청와대와의 갈등 끝에 물러나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진보정권의 이념정치에 막힌 관료의 한계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최근 김 경제부총리는 이 전 부총리처럼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경제를 못 배웠다” 정도는 아니어도 정치권과 청와대에 날을 세웠다. 김 부총리는 8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출석해 논란이 된 ‘정치적 의사결정 위기’ 발언을 해명하면서 “규제개혁 입법, 경제구조개혁 입법에 대해 외람되지만 정치권에서 책임 있는 결단을 내려주셨으면 좋겠다. 그런 것들이 정치적 의사결정의 예라고 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장하성 정책실장을 비판한 게 아니라는 뜻이지만 관가에서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에둘러 완곡하게 얘기하지만 말 속에 뼈가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홍장표 전 경제수석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김 부총리가 “최저임금 효과가 90%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애매한 상황에서 충분히 오해를 살 수 있는 발언”이라며 “(부총리가) 답답했던 것 아니겠느냐”고 전했다.
이념정치에 가로막힌 것도 두 사람이 같다. 이 전 부총리는 참여정부 때의 4대 개혁입법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일자리부터 만들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고 했다. 경제의 정치화에 대한 불만인 셈이다. 참여정부의 DNA를 물려받은 문재인 정부도 소득주도 성장과 그에 따른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공공 부문 81만명 채용 같은 평등이념이 뚜렷한 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반면 대기업은 옥죄고 원격의료 완화 같은 규제개혁은 더디다. 김 부총리가 최저임금 문제로 장 실장과 끊임없이 충돌한 것도 근본적으로는 이념정치 때문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정권에 지분이 없는 관료의 한계라고 보고 있다. ‘늘공(늘상 공무원)’은 정권창출에 기여한 바가 없어 대통령 주변의 정치적 색채가 뚜렷한 ‘어공(어쩌다 공무원)’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진보정부의 경우 복지를 확대하고 시장개입을 늘리려는 경향이 있어 보수성향의 관료와 충돌하게 된다는 해석도 있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 인사들이 관료를 불신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참여정부 때 경제관료의 저항으로 총부채상환비율(DTI) 같은 금융규제를 늦게 시행해 집값이 폭등했다는 게 김수현 사회수석을 비롯한 청와대 인사들의 생각이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차기 부총리가 정치인이 아닌 다음에야 관료가 올 경우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며 “정권에 지분이 없는 관료의 한계”라고 강조했다.
다만 김 부총리가 다른 관료와 달리 자기정치가 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여주기식 일정과 행동이 많다는 것이다. 청와대 내에서도 김 부총리의 자기정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실제 8월 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은 장 실장이 김 부총리를 언급한 듯한 ‘대통령 말도 안 듣는다’ ‘자료도 안 내놓는다’ ‘조직적 저항에 들어간 것 같다’는 글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김 부총리의 발언이 정치 이슈가 되다 보니 ‘러브콜’도 쇄도하고 있다. 야당인 자유한국당 내에서는 “김 부총리를 영입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최근의 발언을 보면 부총리나 청와대 인사나 모두 정치적인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세종=김영필기자 송주희기자 susop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