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야구 대표팀 감독이 지난 14일 감독직 사임 기자회견에서 준비한 원고를 읽으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08년 11월이었다. 프로야구 감독들은 대표팀 감독직을 폭탄 다루듯 했다. 2009년 3월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 감독직을 두고 김경문 당시 두산 감독, 김성근 당시 SK 감독은 차례로 대표팀 사령탑을 사양했다. ‘폭탄 돌리기’ 양상 속에 결국 1회 대회를 이끌었던 김인식 당시 한화 감독이 울며 겨자 먹기로 독이 든 성배를 들어야 했다. 크고 작은 국제대회 때마다 야구 대표팀은 감독 구인난에 시달려왔다. 과거 선동열(55) 당시 삼성 감독은 “대표팀으로 인해 소속팀의 성적이 좋지 않으면 감독은 잘릴 수 있다. 그럴 경우 나라에서 먹여 살려줄 수도 없는 것 아니냐”는 현장의 목소리를 솔직하게 밝히기도 했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도입한 것이 전임 감독제다. 말 그대로 소속된 프로팀 없이 대표팀에만 전념하는 감독을 두는 것이다. 지난해 7월 KBO는 ‘국보 투수’ 출신의 선 감독에게 사상 첫 전임 감독을 맡겨 오는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지휘봉을 맡겼다.
선 감독이 14일 전임 감독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그는 이날 서울 강남구 야구회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감독직 사퇴를 통해 야구인의 명예와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명예를 지키고 싶다”고 밝혔다. 야심 차게 도입한 전임 감독제는 이렇게 불과 1년4개월 만에 좌초되고 말았다.
자신들이 도입한 제도를 KBO가 스스로 발목을 잡은 모양새다. 1월 취임한 정운찬 KBO 총재는 아시안게임 대표팀과 관련한 지난달 23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TV를 보고 대표 선수를 뽑은 것은 선 감독의 불찰”이라고 지적한 뒤 대안도 없이 “개인적으로는 전임 감독이 필요 없다”고도 했다. 앞서 국감에 출석한 선 감독이 “대표 선발 과정에서 불공정이나 특혜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전국 5개 구장에서 열리는 프로야구의 특성상 후보 선수들을 비교하려면 집에서 TV로 지켜보고 뽑는 게 낫다고 밝힌 뒤였다.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본질에서 다소 어긋난 질문과 추궁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는데 정 총재는 “선 감독이 집에서 TV를 보고 선수를 뽑는 게 옳으냐”는 똑같은 질문에 KBO 총재직에 어울리지 않는 답변으로 분란을 야기했다.
선 감독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아시안게임 3회 연속 금메달이었음에도 (귀국장에는) 변변한 환영식조차 없었다. 감독으로서 분투한 선수들의 자존심을 지켜주지 못한 데 대해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었다”며 “지난달 국감에서 어느 의원(손 의원)이 한 ‘그 우승이 그렇게 어려웠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말 또한 저의 사퇴 결심을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 “전임 감독제에 대한 총재의 생각도 (국감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됐다”는 말로 정 총재의 발언에 대해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한 시민단체가 선수 선발과 관련해 부정청탁금지법 위반 여부를 놓고 국민권익위원회에 자신을 신고한 데 대해서도 자존심이 상했음을 분명히 밝혔다. 선 감독은 “대표팀 감독의 국감 증인 출석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스포츠가 정치적 소비의 대상이 되는, 무분별하게 증인으로 소환되는 사례는 제가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희망한다”며 “어떤 경우에도 정치와 스포츠는 분리돼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선 감독은 병역 의무를 일부러 미뤘다는 의혹을 받는 선수를 대표팀에 뽑았다가 일부 야구 팬들에게 십자포화를 맞았다. 이후 화살은 합리적 비판을 넘어 근거가 미약한 비난으로 확대했고 정치권에서 이슈 몰이에 동참한 데 이어 KBO 수장마저 등을 돌리면서 끝내 선 감독의 옷을 벗기기에 이르렀다.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내년 프리미어12 대회와 2020년 도쿄올림픽을 준비해야 하는 대표팀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누가 대표팀 감독을 맡으려 할까’ 하는 야구계의 오래된 걱정은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무거워져 돌아왔다. 장윤호 KBO 사무총장은 “총재와 저, KBO 직원 모두 선 감독의 사퇴를 예상하지 못했다. 총재가 오늘 (사퇴 의사를 전달하고) 문을 나서려는 선 감독을 막아서면서까지 만류하며 ‘도쿄올림픽까지는 맡아달라’고 부탁했다”며 “차기 감독에 대해서는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