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언어정담] 스몰토크의 힘

작가
빨강머리 앤의 시시콜콜한 수다
마릴라의 잿빛 일상을 밝혔듯
작은 주제로 나누는 친밀함·우정
삶의 든든한 지원군 될 수 있어


따스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뭘까. 그들은 사소한 일상적 이야기, 즉 스몰토크의 힘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도 꼭 들어주는 부모들, 배우자와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기분과 건강상태까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체크하는 사람들,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오늘 날씨가 어땠는지 같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다.


행복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스몰토크의 힘을 증언하는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가 ‘빨강머리 앤’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던 마릴라와 매튜 남매는 서로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두 사람 다 과묵하고, 지나치다 싶으리만치 남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당연히 스몰토크 또한 부족했다. 앤이 없었더라면 그들에게는 평생 ‘평화로운 대신 아무런 재미있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마릴라는 처음에 앤의 끝도 없는 수다를 견디기 어려워한다. 조용하던 집안이 갑자기 엄청나게 시끄러워졌으니까. 또한 앤의 끝없이 이어지는 ‘스몰토크’의 주제를 예측도 통제도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앤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끝없는 스몰토크를 들어주며 마릴라는 앤과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의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호수에선 배도 탄대요. 아이스크림 얘긴 제가 했었죠? 아직 한 번도 아이스크림을 먹어 본 적이 없어요. 다이애나가 아이스크림 맛을 설명해 주려고 애썼지만 그건 상상으로는 느낄 수 없는 건가 봐요.” 아이스크림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앤, 소풍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앤. 마릴라는 이렇게 외롭고 곤궁한 삶을 살아왔던 앤에게 안쓰러움을 느끼고, 처음에는 연민으로 시작되었던 이 감정은 깊은 사랑과 헌신의 열정으로 변모한다.


마릴라의 입장에선, 모든 일을 너무도 과도한 열정으로 상상하고 기대하는 앤이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넌 뭘 그렇게 모든 일에 열띠게 구니, 앤. 너무 그러면 앞으로 실망할 일도 많은 법인데.” 앤은 이렇게 말한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그 기쁨의 절반을 미리 누린단 거잖아요. 혹시 이루어지지 못한다 해도 기대하는 동안의 즐거움은 아무도 막지 못할 거예요. 린드 부인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자 복 받을지어다, 그는 결코 실망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줬지만 전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쁜 것 같아요.” 앤은 쓸데없는 수다를 떠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생의 아주 소중한 가치에 대해 매일 눈뜨고 있는 중이다. 린드 부인처럼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결코 실망할 일이 없겠지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삶은 어떤 희망도 기대도 없는 삶이기에. 설령 실망할지라도, 기대를 멈추지 않는 것, 상상만큼 아름답지 않은 현실에 상처받을지라도 꿈꾸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 앤은 바로 그런 희망과 상상, 기대와 창조를 멈추지 않을 권리를 일깨워준다. 목석처럼 단단한 마릴라의 마음은 앤과의 끝없는 스몰토크를 통해 점점 부드럽고 따스하고 풍요로워진다. 앤은 스쳐가는 모든 것에 자기만의 독특한 이름을 붙이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변화하는 감정의 물결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마릴라의 잿빛 일상을 무지갯빛 아름다움으로 물들인다.

‘사랑’은 하지만 ‘친밀감’은 부족한 커플들의 특징은 바로 이런 스몰토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사랑은 서로를 향한 이끌림, 매혹을 전제로 하지만 친밀감은 ‘우정’에 가까운 감정이다. 가족 사이에도, 연인 사이에도, 직장동료나 선후배 사이에도, 단순한 소속감이 아닌 우정에 가까운 감정이 필요하다. 우정의 핵심은 동질감이 아니라 배려와 존중이다. 그가 나와 많이 다를지라도, 상대방이 나와 이해관계를 함께 하지 않을지라도, 그를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을 때 관계는 더욱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스몰토크는 이렇듯 ‘작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결코 그 힘은 작지 않다. 때로는 상대방의 숨겨진 진심을 이해하는 척도가 되며, 먼 훗날 그 사람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때 가장 그리운 대상이 바로 ‘그와 나눈 사소한 대화’가 될 수도 있다. 스몰토크는 아주 소소한 일상의 대화지만 알고 보면 우리 삶의 ‘커다란 힘’이자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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