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한국은행 금융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과 재정국 차관(조우진)은 시종일관 대립각을 세운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1996년 경제 규모 11위, 경제협력기구(OECD) 가입으로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아시아의 용’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550억 달러에 달하는 긴급자금을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년이었다.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상흔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노동유연성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 속에 노동안정성은 바닥을 치고 소수의 대기업이 경제를 떠받치는 빈약한 산업구조는 더욱 심각해졌다. 국치일로 꼽히는 그날로부터 21년이 지난 지금 한 영화가 당시를 회상하고 상흔을 들여다본다. 부도 위기 감지부터 IMF의 구제금융요청을 받기까지 과정을 마치 재난영화 속 주인공들의 생존기처럼 풀어낸 영화 ‘국가부도의 날’(28일 개봉)이다.영화에는 4명의 주역들이 당시 있었을 법한 인간 유형을 대변한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IMF 지원이라는 최악의 카드를 막기 위해 싸우는 한시현(김혜수), 국가 부도 위기를 계기로 대기업 위주로 경제의 새 판을 짜려는 재정국 차관(조우진), 위기를 직감하고 위험에 베팅하는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도산 위기에 허덕이는 영세 사업자 갑수(허준호) 등 네 인물은 각자의 생존전략으로 분투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한국은행 금융정책팀장 한시현 역을 맡은 김혜수. /사진제공=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4명의 주역 배우 중 시종일관 부딪히며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김혜수(48)와 조우진(39)을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각각 만났다.
외환위기 당시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였던 김혜수와 당시 고3 수험생이었던 조우진이 기억하는 1997년은 조금 달랐다. 김혜수는 “시나리오를 읽으며 ‘내가 분명히 살았던 시대인데 이렇게 몰랐나’ 생각이 들었다”며 “지금에서야 내 친구와 가족들이 당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게 된 게 부끄럽다”고 했다. 반면 조우진은 “인생의 첫 풍파를 겪은 시기”라고 회고했다. 학비가 없어 대학에 등록도 할 수 없었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단다.
그러나 영화 속 캐릭터들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시현은 국민에게 위기를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차관은 혼란만 가중시킨다며 이를 막아서고, 부도 위기 속에 시현은 서민층의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 하지만 차관은 새 판을 짤 절호의 기회라며 IMF 구제금융 신청을 강행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재정부 차관 역을 맡은 조우진.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눈에 띄는 것은 두 배우의 완벽한 호흡이다. 조우진은 “영화를 촬영하면서 세운 목표는 단 한 가지 ‘한시현을 끓어오르게 하는 것’이었다”며 “김혜수 선배와 호흡을 맞출 때마다 듀스(40대 40 동점) 상황이 이어지는 테니스 게임을 끝도 없이 벌이는 기분이었다”고 귀띔했다.그런 그를 김혜수는 “연기 천재”라며 칭찬했다. 김혜수는 “짧지 않은 연기 인생인데 상대 배우에게 경외심을 느낀 순간은 많지 않았다”며 “조우진 씨는 연기를 할 때마다 경외심이 들었고 호흡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큰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로 꼽히는 IMF 협상 장면. 김혜수는 어려운 경제용어와 영어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연기 내공을 과시했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김혜수 역시 소신 있는 자세와 능력을 갖춘 전문직 여성으로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소신으로 가득 찬, 전형적인 주인공 캐릭터로 다소 지루함이 느껴질 법하지만 김혜수만의 내공으로 틈을 내고 숨을 불어넣은 셈이다. 특히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IMF 협상 장면에서 김혜수는 IMF 총재 역을 맡은 프랑스 대배우 뱅상 카셀을 앞에 두고 온갖 경제용어가 난무하는 영어 대사를 쏟아내며 연기 내공을 과시했다. 김혜수는 “뱅상 카셀의 대사까지 통째로 외워 자다가도 눈을 뜨면 대사를 줄줄 읊을 정도였다”고 돌아봤다. 조우진 역시 “협상 장면을 촬영한 일주일은 모든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낸 시간이었다”며 “어느 누구도 뱅상 카셀과 함께 연기한다는 기쁨으로 들뜰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한국은행 금융정책팀장 한시현 역을 맡은 김혜수. /사진제공=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두 사람은 이 영화를 “IMF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배우들의 에너지를 갈아 넣은 것은 물론이고 라디오 방송국에 보낸 엽서, 음악, 의상까지 그 시대의 공기를 담아낸 영화입니다. 상상력을 보탰다고는 하지만 적지 않은 취재로 허구와 상상일 뿐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무거운 이야기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죠.”(조우진)
“이 영화는 어린 아이들까지 가족이 함께 봤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1997년을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이 영화를 매개로 많은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어요.”(김혜수)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