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시는 미래 수소차 시대를 대비한 노사정 대화를 최근 시작했다. 울산은 2010년대 들어 역내성장률이 연평균 2%로 전국 최하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올해 울산의 3·4분기 실업률은 4.9%로 분기 기준 1999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높았고 17개 전국 시도 중에서도 최고치다. 울산은 국내 자동차·유화·조선 산업 중심기지이자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등 주요 기업을 거느렸지만 조선·자동차 산업 부진의 직격타를 맞았다. 울산시 관계자는 “이제 막 대화를 시작해 구체적인 노사정 일자리 협력 방안을 말하기는 어렵다”면서 “다만 미래 자동차 산업 재편에 노사정이 힘을 모아야 기업과 지역이 모두 살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협력의 토대를 다지는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자동차와 조선 등 제조업에 빨간불이 켜진 가운데 민주노총 등 일부 강경 노조들이 대화보다는 자신만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투쟁 노선만을 고집하는 것은 결국 국가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노조가 머리띠를 묶고 거리에 나서는 대신 정부·회사와 위기 극복을 위해 새로운 협력의 틀을 만들어낸 독일이나 스웨덴의 성공 사례를 재연하지 않고서는 한국 경제는 결국 벼랑 끝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다음달 2일이 기한인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성사시키기 위한 현대차와 광주광역시 측의 협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울산시를 비롯한 각지에서도 노사 상생형 일자리 사업 구상이 움트고 있다. 광주형 일자리는 현대차의 투자를 받아 임금을 기존 정규직의 절반 가까이(연봉 3,500만원)로 줄이되 완성차 10만대 규모, 직간접 일자리 1만여개의 제조공장을 광주 빛그린산업단지에 세우는 일자리 혁신사업이다.
경북 구미시는 지난달 조직개편을 단행해 일자리경제과를 신설하고 노동복지과를 지방자치단체 최초의 노사협력 전담부서로 바꿨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이해찬 대표는 이달 초 전북 군산시를 찾아 “광주형 일자리 같은 군산형 일자리 사업을 전북도와 여당이 함께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군산시에서는 광주형 일자리 협상이 끝내 결렬되면 군산이 대체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22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출범시키며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 같은 노사 현안을 사회적 대화로 풀기 위한 틀을 완성했다. 목표는 광주형 일자리 사업의 원형이라 할 독일의 ‘아우토 5000’, 스웨덴 노사정 협력 80년 역사의 주춧돌을 놓은 ‘살트셰바덴협약’을 재연하는 것이다. 문제는 대화 대신 투쟁에만 골몰하는 민주노총 등 노동계의 강경 세력이다.
독일 ‘아우토 5000’은 현지 최대 완성차 그룹인 폭스바겐이 “포르투갈 등 외국만큼 생산비용을 낮추지 못하면 독일 내 투자를 멈추겠다”고 공언한 와중에 탄생했다. 폭스바겐은 총 5,000개의 일자리를 갖춘 공장을 니더작센주 볼프스부르크·하노버에 나눠 짓는 계획을 제안했다. 대신 주말을 포함한 주당 근로시간이 최대 48시간에 이르고 월급은 폭스바겐 정규직의 80% 수준인 5,000마르크(한화 360만원)로 고정된 근로조건을 요구했다. 폭스바겐의 제안은 주35시간 근로를 요구한 독일 금속노조의 반발을 샀지만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독일 총리가 중재에 나서 ‘주 최대 42시간 근로’로 극적 타결을 이뤘다. 이렇게 세워진 아우토 5000 공장은 폭스바겐 베스트셀링카인 ‘투란’ ‘티구안’의 생산기지로 활약했다. 2009년 아우토 5000 프로그램이 종결될 때 이곳 직원들은 폭스바겐 정규직으로 채용됐다.
1938년 스웨덴 노총(LO)과 경영자총협회(SAF)가 3년간의 협상 끝에 타결한 ‘살트셰바덴협약’은 현재까지 스웨덴 노사정 협의의 기본 틀을 이룬다. 노동계는 발렌베리 등 스웨덴 대기업 오너 일가의 지배권을 인정했고 기업들은 일자리 제공과 기술투자를 약속했다. 기업 이익금의 85%도 사회보장 재원(법인세)으로 내놓았다. 전문가들은 “이 협약을 통해 임금 인상 자제와 완전고용·복지개혁을 교환하는 스웨덴 모델이 출발했다”며 “유럽에서 가장 파업이 많은 나라였던 스웨덴은 고용·복지·성장을 함께 추구하는 나라로 변모했다”고 평가한다. 특히 살트셰바덴협약을 통해 노사 교섭 방식을 산업·지역별 단체교섭으로 정하며 무분별한 파업을 막고 협상을 독려하는 규제가 마련된 것도 중요한 성과다.
하지만 국내에서 이 같은 노사협력을 실현하는 시도는 노동계의 반대에 부딪혀 표류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경사노위 참여를 거부한 채 21일 총파업과 다음달 1일 민중대회 등 거리투쟁에 골몰하고 있다. 광주형 일자리에 대해서도 “지자체 간 일자리를 따내기 위한 ‘저임금 경쟁’이 촉발되고 노동자들의 임금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반대만 하고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차지부는 광주형 일자리 사업 협약이 체결되면 총파업에 돌입한다고 엄포도 놓았다. 자동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차 정규직 노조는 광주형 일자리가 성사된다면 자신들의 임금 인상 명분이 꺾일 것으로 우려해 반발하는 것”이라며 “광주형 일자리 시도가 무산되면 정부의 노사관계 혁신 구상은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민주노총이 각종 사회적 대화에 나서야 진정한 노사 혁신도 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경사노위의 한 관계자는 “민주노총은 조선·철강·자동차 등 노사구조 혁신이 절실한 주력산업 노조를 산하에 두고 있다”며 “민주노총이 빠진 채 경사노위가 이들 산업의 재편을 위한 논의를 벌인다면 노조의 반대로 성과를 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종혁기자 2juzs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