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전 김명수 대법원장이 탄 승용차에 화염병을 던진 70대 남성이 서울 서초경찰서 지능범죄수사과에서 다른 곳으로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재판거래’ 의혹으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가운데 김명수 대법원장이 판결에 불만을 가진 시민에게 ‘화염병 테러’를 당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김 대법원장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최근 추락한 사법부의 현 주소를 확인해준 사고였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7일 오전9시5분께 출근을 위해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문을 지나던 김 대법원장 차량은 1인 시위를 하던 남모(74)씨가 던진 화염병을 맞고 불이 붙었다. 남씨는 시너를 담은 500㎖ 페트병에 불을 붙여 김 대법원장 차량에 투척했다. 불은 곧 차량 보조석 뒤 타이어와 후미 쪽에 옮겨붙었다. 대법원 청원경찰들은 소화기로 즉시 불을 진화하고 오전9시11분 남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김 대법원장은 차량에 나오지 않은 채 소화 과정을 기다렸다가 대법원 청사로 들어갔다. 김 대법원장은 돌발 사고에도 다른 차량을 타고 오전11시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오후5시 수원지법 등 예정된 법원 순행 일정을 소화했다.
불은 남씨 몸에도 일부 붙었으나 곧장 진화돼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9시27분 출동한 경찰에게 ‘화염병사용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검거된 남씨 가방에는 페트병이 4개 더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
남씨가 김 대법원장에게 테러를 시도한 것은 지난 11월16일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이 확정된 자신의 민사재판 결과에 대한 앙심 때문으로 알려졌다. 2004년부터 강원 홍천에서 돼지 농장을 운영하던 남씨는 2007년부터 유기축산물 부분 친환경인증을 받아오다 2013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인증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유기농이 아닌 벼가 섞인 사료를 사용했다는 이유였다.
이에 남씨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직원이 허위로 인증 관련 문서를 작성했다”며 정부를 상대로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냈다. 하지만 1·2심은 모두 “행정 처분에 위법은 없었다”며 원고 패소 결정을 내렸다. 남씨는 7월 대법원에 상고한 뒤 9월20일부터 대법원 앞에서 김 대법원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시작했다. 10월10일에는 퇴근하는 김 대법원장 차량에 맨몸으로 돌진하려다 제지를 받고 실패하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남씨는 민사소송 사건과 관련해 법원이 자신의 주장을 받아주지 않아 화가 나 범행했다고 진술했다”며 “공범·배후 여부 등 엄정 수사 후 구속영장을 신청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대법원, 대법원장 공관 주변에 정보관을 증원 배치하고 돌발상황을 대비해 각급 법원에 핫라인을 구축할 것”이라며 “대법원장에 대한 경호활동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사건이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 의혹과 현 김명수 사법부의 우유부단한 대처가 빚어낸 참사로 해석했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다 보니 대법원 확정 판결에도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 사법부는 재판거래 의혹에 대해 자체조사·검찰수사·영장심사 등 각 단계마다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하며 불신을 키웠다. 법원이 앞장서 혐의를 거부하는 사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물론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까지 구속 위기에 처했다. 최근에는 전국법관대표회의가 ‘동료 법관 탄핵 촉구안’을 통과시키고 사법개혁 후속추진단장이 김 대법원장을 공개 비판하는 등 법원 내부조차 사분오열하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은 특별재판부 설치 도입과 법관 탄핵까지 논의하고 있어 사실상 대법원장과 사법부의 권위는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평가다.
이날 대법원 정문 앞에는 남씨 외에도 대법원에서 자신의 패소가 확정된 데 불만을 품은 시위자들이 여럿 진을 치고 있었다. 남씨 곁에서 시위를 하다 범행을 지켜본 한 중년 남성은 대법원장을 비난하는 독설을 내뿜기도 했다. 한 변호사는 “재판거래 의혹 발발 이후 자신의 과거 대법원 판결에 대해 잘못된 결과가 아니냐며 변호사들에게 항의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며 “지금처럼 법원 판결에 승복하지 않는 분위기에서는 사법부 스스로 의혹 규명에 최선을 다해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윤경환·오지현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