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현 무역협회 부회장
최근의 기술혁신을 설명하면서 종종 등장하는 단어가 ‘립프로깅(Leapfrogging)’이다. 기술이 기존 단계를 밟아가며 순차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 단계를 건너뛰어 곧바로 높은 단계에 진입하는 현상을 개구리의 도약에 빗댄 것이다.
기술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제치고 새로운 선도자가 되는 과정에서 립프로깅이 발생하는데 우리나라 사례가 주로 소개된다. 지난 1983년 당시 한국은 선진국이 20년이나 걸린 반도체 개발단계를 6개월 만에 뛰어넘어 64K D램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 될 수 있었다. TV 분야에서도 일본이 주도하는 아날로그 TV 기술력을 뒤쫓기보다 디지털 전환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곧바로 올라타 세계적인 디지털 TV 경쟁력을 보유하게 됐다.
한국이 립프로깅에 성공한 배경에는 선발주자들이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했던 안이함이 깔려 있다. 한국 기업들이 액정표시장치(LCD) 패널에 과감하게 투자해 디지털 TV로 전환하는 동안 세계 TV 시장 1위 브랜드 소니는 여전히 브라운관 중심으로 시장을 끌고 가려다 주도권을 빼앗겼다. 모바일 기기 시장점유율 1위 노키아는 스마트폰 운영체제(OS)가 애플 iOS와 구글 안드로이드로 양분되는데도 자체 OS를 고집하다 삼성에 자리를 내줬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는 요즘 우리 모습을 보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껍데기만 쫓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과거 선발주자들의 몰락한 행보와는 분명 다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많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충분한 분석이나 전략 없이 패러다임의 전환 자체에만 매몰돼 세심한 준비가 미흡하다. 4차 산업혁명의 주요 추진 과제 중 하나인 스마트 공장이 대표적이다.
독일이 스마트 공장의 선두주자가 된 배경에는 숙련 노동자의 은퇴와 노동원가 및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오프쇼어링 확산이 자리 잡고 있다. 성장 한계에 봉착한 독일 업체들은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ICT)을 융합해 자동생산 체제를 구현하는 것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다만 그들은 스마트 공장을 도입하더라도 기술과 투입자본·기대효과 등을 철저히 따져 필요한 부문에 한해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얼마 전 필자가 둘러본 독일의 공장 자동화 설비업체 페스토는 기계에 QR코드를 부착하는 데만 1년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등 스마트 공장 추진에 적극적이지만 투입 대비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생산라인은 여전히 기존 체계를 고수하고 있다.
우리 산업계는 제조환경이나 기술 수준은 고려하지 않은 채 스마트 공장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게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업종별 특성에 맞는 추진전략의 수립과 집행, 주요 기반기술 개발, 전문인력 양성 같은 기본 요소들이 전제되지 않으면 스마트 공장은 껍데기에 그칠 수밖에 없다.
저기 우리가 올라야 할 산이 있다. 정상 정복을 다짐했다면 뜨거운 열정만큼이나 냉철한 준비가 필요하다. 장비를 챙기고 기상조건과 경로를 살피면서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런 다음이라야 실패 없는 립프로깅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