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포용국가’라는 낭만

정상범 논설위원
국책연구소마다 정책 구체화 몸살
과도한 국가 개입에 성장은 ‘뒷전’
혁신은 정부 아니라 민간에 맡겨야
국민은 구호가 아니라 성과를 원해





얼마 전 한 국책연구원장을 만나 관심사를 물었더니 포용국가를 연구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다는 뜻밖의 얘기가 돌아왔다. 정부의 새 국정철학인 포용국가에 대한 구체적 이론과 실현방안을 만들어 보고서로 제출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국책연구소마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별도의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연구원들을 독려하고 있지만 성과가 쉽게 나오지 않아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선례가 없는 이론인데다 개념조차 낯설어 제대로 연구방향을 잡기 어렵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포용국가’와 ‘포용적 성장’은 다른 얘기가 아니냐고.

정부가 최근 ‘혁신적 포용국가’를 새로운 정책 비전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주변에서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이들이 많다. 정부 부처마다 나를 안아주는 혁신적 포용국가, 국민의 전 생애를 책임지는 정부라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서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내로라하는 국책연구소마저 머리가 아프다면 일반 국민들은 오죽할까 싶다. 정부는 모든 구성원을 특권과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우하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청와대는 사회안전망을 만들어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성장이 성과를 내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


포용국가가 지향하는 대안을 찾아봤더니 노르딕형(북유럽 국가)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이었다. 한국과 동아시아형 발전국가 모델은 불평등 심화와 사회 갈등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종말 단계에 접어들었다며 신자유주의가 낳은 영미형 자유시장 모델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르딕 모델의 세 가지 핵심이 사회통합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드는 원리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바로 포용성과 혁신성·유연성이다.

이론적으로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말과 정책이 어디 있을까 싶다. 하지만 고단한 일상에 지친 국민들로서는 피부에 와 닿지 않다 보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마련이다. 좌우 양쪽에서 비판받는 것도 포용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학계에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세계은행에서 포용적 성장을 주창했다고 하지만 우리식 포용국가와 궤가 다르다는 의견이 많다.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이란 경제 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재정이나 연기금을 통한 복지와 소득 재분배에 초점을 맞추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라는 것이다. 반면 포용국가란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 임금 분배 역할까지 떠맡으며 성장을 촉진하자는 것으로 주류 경제학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혁신적’이라는 수식어까지 따라붙었으니 정부에서 혁신활동을 주도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는 의문까지 나온다.

국가의 정책 어젠더는 무엇보다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와 공감대를 확보해야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역대 정부에서도 ‘비전 2030’ 같은 거창한 미래전략 비전을 만들었지만 별다른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정권마다 등장했던 국민행복론이나 747정책도 허황된 정치적 수사로 끝나버렸다. 경제 살리기는 구호로만 이뤄지지 않을뿐더러 과거 개발독재의 정부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얘기다. 당장 약자부터 살리겠다는 포용정부가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과 서민 등 사회적 약자를 더 힘들게 하고 양극화 현상을 부추기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국민은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 정책보다 당장 하루 생계를 책임질 그런 정부를 원한다.

낭만(浪漫)은 ‘로망스’라는 프랑스어에서 빌려온 말이다. 현실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의 꿈과 감정에 충실했던 낭만주의는 결국 현실인식을 강조하는 사실주의에 밀려나고 말았다. 하물며 국가 청사진이 낭만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국민은 구호와 네이밍이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성과를 요구하고 있다. ssa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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