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현지시간) 미국 샌디에이고와 국경이 접한 티후아나시에 마련된 이민자 보호시설에서 한 여성 이민자가 폭우에 무너진 자신의 임시텐트를 바라보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 /티후아나=AFP연합뉴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꿈을 품고 수천㎞를 이동한 중미 출신 이민자 행렬(캐러밴·Caravan) 중 일부가 고국으로 발걸음을 되돌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종 질병 등 열악한 환경에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미래 등 현실의 벽에 부딪혀 결국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멕시코 일간 밀레니오와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 샌디에이고와 국경이 접한 티후아나시에서 미국 망명신청을 기다리던 350명이 모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이민 당국에 전달했다. 전날 멕시코 이민청(INM)은 전날 트위터를 통해 105명의 이민자를 본국으로 되돌려보냈다고 밝혔다. ‘숙박·취사시설을 갖춘 트레일러’라는 뜻의 캐러밴은 미국 국경으로 향하는 중미인 행렬을 가리킨다. 온두라스·과테말라·엘살바도르 출신들이 모이지만 온두라스인이 10명 중 8명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다. 이 가운데 5~10%는 어린이들이다. 이번에 본국으로 돌아간 이민자의 대부분도 온두라스인이다.
살인·강도·납치 위협까지 이겨내며 멕시코를 통과했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고국행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티후아나 보호소의 환경이 열악한 것이 원인으로 꼽힌다. 멕시코 정부는 현재 티후아나를 비롯한 바하 칼리포르니아 주에 9,000명에 달하는 중미 이민자가 머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중 티후아나에만 6,000여 명이 베니토 후아레스 스포츠단지와 주변에서 노숙하고 있다. 티후아나 시 당국이 마련한 임시보호소 수용인력인 2,000여명의 3배에 달하는 규모다. 이민자들이 포화상태인데다 갈수록 비위생적인 환경에 노출되면서 호흡기 질환 및 수두 등의 질병도 늘어나고 있다. 이민자들은 티후아나 임시보호소에 있는 텐트와 바닥에서 담요와 비닐봉지 등을 깔고 생활하고 있다. 특히 후발대 캐러밴 2,000명이 미국 국경을 향해 북상 중이라 티후아나를 비롯한 국경도시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후안 마누엘 가스텔룸 티후아나 시장은 “시의 능력으로는 이민자들이 원하는 음식, 의약품, 공간 등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서 “연방정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현 정부와 차기 정부 모두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호소했다. 시 당국은 캐러밴 지원금을 하루에 3만달러(약 3,300만 원) 쓰고 있어 곧 캐러밴을 지원할 수 있는 시 재정이 바닥난다고 우려하고 있다.
29일(현지시간) 미국 샌디에이고와 국경이 접한 티후아나시에 마련된 이민자 보호시설에서 한 이민자가 물이 들어찬 자신의 텐트를 들여다 보고 있다. /티후아나=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강경한 정책도 미국 입국 희망을 저버리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 정부가 미국으로 향하는 캐러밴을 돌아가게 해야 한다며 필요하다면 국경을 영구 폐쇄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민자들이 미국의 망명심사가 끝날 때까지 멕시코에 머물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며 망명신청 신규 접수를 더디게 처리하는 지연책을 쓰면서 수개월 동안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는 깃발을 흔드는 이주자들을 자국으로 되돌아가게 해야 한다, 그중 많은 사람은 냉혈한 범죄자들”이라며 “비행기로 하든, 버스로 하든, 어쨌든 원하는 대로 하라. 하지만 그들은 미국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다음 달 의회가 새로 처리할 정부 예산안에 멕시코 장벽 건설 예산을 반영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난 25일에는 샌디에이고와 접한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캐러밴이 기습적으로 국경을 넘으려 하자 미 국경순찰대가 최루가스를 발사해 저지하는 등 강경 대응을 하기도 했다. 당시 일그러진 표정의 엄마가 연기가 자욱한 최루가스에 질식되지 않으려고 두 딸의 손을 잡은 채 황급히 어디론가 뛰어가는 모습이 공개돼 국제사회와 정치권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와 접경 지역인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25일(현지시간) 미국 국경 진입을 시도하던 온두라스 출신 이주민 모녀가 국경수비대가 발사한 최루탄을 피해 달리고 있다. /티후아나=로이터연합뉴스
물론 현장에 남은 이민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AP통신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10명의 이민자 여성들이 미국 당국이 망명 신청을 받아들이도록 압박하기 위해 단식 투쟁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온두라스 출신의 여성 클라우디아 미란다는 이날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후나아에서 약식 기자회견을 열고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아 여성운동단체로서 우리가 단식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단식 투쟁을 결의한 이들 여성은 흰색 깃발을 몸에 두르고 피켓을 든 채 미국 이민국 사무소 앞으로 가려 했으나 경찰의 저지를 받았다. 이들은 멕시코 이민 당국이 현지에 남기를 원하는 이민자들에게는 신속하게 인도주의 비자를 발급할 것도 아울러 촉구했다. 다만 단식 투쟁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AF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40년 만에 최저로 떨어졌던 불법이민자 수가 올 들어 증가세를 보이자 과테말라·온두라스·엘살바도르에 지급하는 연간 지원금 5억달러를 삭감하겠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정부는 또 캐러밴을 막기 위해 최대 1,000명의 현역 군인을 국경지대에 배치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같은 조치가 캐러밴을 막는 데 근본적인 처방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불법이민자 한 명당 체포·기소·추방비용으로 수천달러가 들어간다는 점을 생각할 때 중미인의 모국 정착을 돕는 지원 프로그램이 오히려 비용 대비 효율적”이라면서 “지원금이 끊기면 더 많은 캐러밴이 몰려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홍용기자 prodig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