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3월이면 독일 서북부의 작은 도시 하노버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인파로 몸살을 앓는다. 이곳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정보통신박람회 ‘세빗(CeBIT)’을 참관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관람객들이 몰리다 보니 숙박시설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주말이면 천정부지로 치솟는 암표조차 구하기 쉽지 않았다. 참가기업들은 명당자리를 차지하느라 돈다발을 싸들고 자리싸움을 벌인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세빗의 꽃’으로 불리는 26번 홀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기업들의 명암이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세빗은 1970년 하노버 산업박람회의 사무기기 분야에서 출발했지만 정보기술(IT) 붐을 타고 1986년부터 독립적인 박람회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한때 85만명의 관람객들이 몰려 미국의 컴덱스와 함께 양대 IT 전시회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일본 도시바가 세계 최초의 노트북 ‘T1100’을 처음으로 공개한 곳도 하노버였고 대형 TV나 휴대폰 등 첨단제품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곳도 세빗이었다. 2000년에는 세빗에 출품될 LG전자의 60인치 PDP TV가 수송과정에서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어야 했고 독일 경찰이 특허권 침해를 단속하겠다며 전시제품을 압수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매년 행사에 초청되는 IT 거물들의 면면도 최대 관심거리였다. 2011년에는 포드자동차의 앨런 멀럴리 최고경영자(CEO)가 같은 시기에 열렸던 제네바모터쇼를 제치고 처음으로 세빗에서 기조강연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빠짐없이 세빗 전시장을 찾아 기업들을 격려해왔고 지난해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등장해 새로운 기술부흥을 다짐하기도 했다.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던 세빗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소식이다. 세빗 주최 측인 도이체메세는 내년 행사를 6월24~28일로 잡아놓았지만 국내외 기업들의 저조한 관심 때문에 결국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최근 IT 전시회의 주도권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CES’와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MWC’ 등으로 넘어간데다 하노버의 취약한 인프라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관람객들의 눈을 끌 만한 이벤트가 부족한 것도 입지를 더욱 좁혔다. 세빗 측은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33년간 고마웠다”며 아쉬워했다.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경쟁에 밀려 퇴장당하는 것은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듯하다.
정상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