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옥연 ‘달밤’ 1999년, 캔버스에 유채, 130x109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누가 하늘에 저런 천 자락을 걸었으려나. 가리려고 드리운 장막인가, 보여주려 내리친 은막인가. 세 자락 천 사이로 휘영청 뜬 보름달이 비친다. 달도 푸르고 하늘도 어두운 푸른빛이니 저 천이 없었더라면 달은 어떤 색 어떤 모양이었을까. ‘청회색의 음유시인’이었던 화가 권옥연(1923~2011)의 1999년작 ‘달밤’이다. 꿈꾸듯 그린 화가요, ‘한국적 초현실주의’라 불리는 그림이니 풍경 참 엉뚱하고 기괴하다. 흔히 그림에서 달은 여성을 상징하고 수직적인 것은 남성을 은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둥근 달과 길쭉길쭉 늘어뜨린 수직의 면이 중첩됐으니 은밀한 상상을 펼치기에도 충분하다. 살바도르 달리의 풍경들이 갖가지 상상과 환상을 끌어내는 것처럼 권옥연의 몽환적 이미지는 특이한 공간감 속에 신비로운 얘기거리를 끄집어낸다. 단,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쓴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이 권옥연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 “당신의 그림에 동양적 초현실주의가 숨어있다”고 했던 말처럼 그의 그림은 ‘한국적 초현실주의’로 동서양 화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을 갖는다.
초현실주의는 말 그대로 꿈같은 그림이다. 그러니 이 ‘달밤’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간밤 꿈같은 풍경이다. 화면 대부분을 차지한 음울한 청회색은 물감을 풀고 섞다가 우연히 나올지언정 쉽사리 만들어 쓸 법한 색이 아니다. 표현의 색이기보다는 절제의 색이다. 그래서 한눈에 좋아보이지는 않을 수 있으나 묻어둔 깊은 감성을 툭 차듯 건드린다. 그림 앞에서 발이 무거워지는 이유다. 화가는 일찍이 1960년대부터 이 같은 ‘풍경 아닌 풍경화’를 그려왔다.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이 컸던 까닭인지 그림에는 그리움의 원천인 옛집과 달도 등장한다. 시공을 뚫고 날아갈 듯한 학, 삼국시대 왕릉에서 출토됐을 법한 곡옥, 목이 기다란 토기와 작은 불 밝힌 호롱불, 성황당 당산나무를 휘감은 색색의 천 등이 그림을 가로지른다.
권옥연 ‘첼로를 연주하는 여인’, 1953년, 캔버스에 유채, 95.5x65.5cm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그 어떤 실마리도 주지 않지만 권옥연의 그림에서는 색(色)이 노래하고 선(線)이 재잘거린다. 프랑스 화가 라울 뒤피(1877~1953)의 경우 모차르트는 분홍, 드뷔시는 연녹색으로 묘사했더랬다. 청회색과 녹회색, 암회색을 사용하는 권옥연의 그림은 화려하게 펼쳐보이는 피아노나 현악기보다는 새겨들어야 귀에 닿는 타악기를 닮았다. “소박함은 예술의 순수한 원형을 상징한다. 산에서 베어다 손질하지 않은 것 같은 이 통나무 의자 따위의 소박함이 현명함을 넘어서서 그 어떤 인간의 본질을 느끼게 한다.”
권옥연은 1923년 함경남도 함흥의 권진사댁 5대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양악에 심취했고, 자신도 나긋한 목소리에 성악하기 충분한 역량을 가졌으며 원래 꿈은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하지만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중) 재학시절 일본인 미술교사의 영향으로 화가가 되기로 했다. 그는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로 유학을 떠났다. 주경·이쾌대·이중섭·장욱진 등이 같은 학교 출신이다. 따지자면 권옥연은 2세대 서양화가였고 격변기 한복판에서 살았다. 한국전쟁이 터져 피난 내려간 부산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은 평생의 반려자 이병복(1927~2017)이다. 40여 년간 극단 ‘자유’를 이끌었고 ‘한국 무대미술계의 대모’로 불리는 1세대 연극인인 바로 그 이병복 여사다. 남편 못지않은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아내는 이화여대 영문과 재학 중 연극반 활동으로 생의 방향을 틀었고, 졸업 후 극단 ‘여인소극장’ 활동 중에 전쟁을 겪었다. 피난지에서 만난 두 예술가는 1951년 결혼했다. 권옥연이 그해 그린 여인 누드화는 아내를 모델로 삼았다.
권옥연 ‘꿈’ 1960년, 캔버스에 유채, 73x100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화가는 타고난 풍채와 인물이 좋았고 넥타이부터 스카프까지 두루 잘 어울리는 멋쟁이였다. 그림도 화가를 닮아 세련미를 풍긴다. 현존하는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되는 1947년작 ‘창신동 풍경’은 한국은행 소장품이다. 지붕에 눈(雪) 짊어지고 다닥다닥 붙은 그 시절 창신동 집들이건만 가난과 추위를 내색 않고 당당하다. 1948년작 ‘고향’은 제 1회 국전(國展) 입선작이자 한국산업은행(KDB산업은행의 전신) 소장품인데, 고갱의 말년 역작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비롯한 타히티의 여인들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정도로 분위기가 흡사하다. 황토색 들녘을 배경으로 항아리 안고 과일 광주리 이고, 머리 감고 피리 부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가슴 내놓고 앉은 여인과 한쪽 손을 볼에 댄 채 고개 기울여 생각에 빠진 여인은 새로운 자각을 상상하게 한다. 이미 이때부터 권옥연의 그림에는 글로 다 적지 못한 문학성과 서정성, 그리고 낭만적 세계관이 짙었다. 당대의 ‘모던보이’로 모더니즘에 심취하고 고갱의 상징주의에 빠져있던 권옥연은 1957년 아내와 나란히 프랑스로 갔다. 파리에서 순수미술을 파고든 남편은 앵포르멜을 선도적으로 선보였고, 의상과 조각을 공부한 아내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무대미술과 무대의상의 개념을 들여놓았다. 노래 좋아하고 놀기 좋아했으며, 따르는 여인도 많았지만 부인의 ‘쿨한’ 성격 덕에 둘은 나란히 예술원 회원으로, 해로했다.
권옥연의 호는 무의자(無衣子). 옷 없이 벌거벗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형식과 격식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선언같은 이름이다. 이름처럼 본성에 충실했고, 관능을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점은 그가 즐겨 그린 일련의 여성 인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53년작 ‘첼로와 여인’이나 이듬해 그린 ‘부채를 든 여인’ 등을 보면 짧고 뾰족한 턱선에 콧날은 오뚝하나 코끝이 버선처럼 살짝 들리고 입술이 도톰한 인물들로 이국적 여성이 등장한다. 권옥연은 그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지루할 때면 여인 초상을 그리곤 했다. 신혼 때 아내를 모델로 그린 여성 인물화는 전쟁의 핍진함 속에서도 색을 잃지 않은 생명력이 강조됐다면 이후의 여인상들은 화가의 꿈이자 이상(理想)이었다. 귀여운 콧날에 풍성하고 긴 머리는 수줍게 몸을 틀어 가리지만 관능적인 유혹을 지워내지 못한다. 그의 상상 속에서 수십 년 살았던 여인은 새침하면서도 불안하다. 하이라이트 처리해 밝게 빛나는 콧등과 부푼 입술이 오히려 응어리로 보일 만큼 역설적인 인물이다. 여기다 특유의 푸른 색조가 더해지니 우수에 찬 애잔함이 인물을 관통한다. 회색은 도시의 색이다. 회색조 그림 속에서 벌거벗은 여인은 그 콧대만큼이나 봉긋 솟은 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끝없이 갈망하고 다시금 도전하게 하는 생(生)의 원천이었다. 빛 든 벽같은 암회색과 청회색, 녹회색으로 그린 그의 작품은 고독하고 불안한 애수를 전한다.
“평생 그림을 그리면서…사람을 그린다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거듭 느낀다. 나는 다른 일을 할 때는 입술이 마르지 않는데 얼굴을 그릴 때는 입술이 마르고 편도선이 붓고 혈압이 오른다. 얼굴이라는 것이 그게 표정을 너무 그리면 간판 같아지고 표정을 너무 안 그리면 인형 같아지는 것이다.”(1982년 미술계간지 ‘화랑’에서)
권옥연 ‘기도하는 사람’, 1960년대, 캔버스에 유채, 88x77cm /사진제공=가나문화재단
화가가 그린, 마치 한 사람인 것 같은 여성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그의 인물화는 모델없이 작가의 상상과 무의식에서 태어났다. 권옥연의 몽환적인 풍경화가 말로 다 못 적을 이야기들 속에 성적(性的) 암시를 숨겨놓았듯, 여인상에는 점잖은 척 숨기곤 하는 솔직한 욕망과 갈망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그를 “예술이란 현실이면서 동시에 꿈이란 사실을 거듭 확신”하고 있다고 평했다.
권옥연과 이병복 부부는 1968년 명동에 ‘카페 테아트르’를 열어 예술인들의 아지트를 마련했다. 또한 둘은 허물어져 가는 고택을 지키고자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무의자박물관’을 마련했다.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의 시댁인 ‘궁집’, 순조의 큰며느리 신정왕후 조씨의 친정인 ‘군산집’, 구한말 송병준 대사의 ‘용인집’ 등 고택을 옮겨다 복원한 한옥 7채를 품고 있다. 그림 말고도 남긴 게 많은 예술가였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