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길 잃기 안내서] 페미니스트이자 예술비평가인 솔닛처럼…길을 잃어야, 나를 만난다

■리베카 솔닛 지음, 반비 펴냄
'맨스플레인' 개념 만든 솔닛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 풀어내며
상실서 얻는 '방황'의 중요성 강조
"길 잃는 법 모르면 파국 겪게 될 것"


‘맨스플레인(man+expalin)’이라는 개념은 2010년 처음 등장해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맨스플레인’은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결합한 합성어로, 남자가 여자에게 잘난 척하며 아랫사람 대하듯 설명해주는 것을 뜻한다. 미국 페미니스트 수필가인 리베카 솔닛이 2010년 한 칼럼에서 21세기에도 만연한 젠더불평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이 단어는 같은 해 뉴욕타임스(NYT)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됐다. 이렇듯 ‘맨스플레인’은 솔닛의 역할에 힘입어 신조어가 아닌 통용어로 자리잡은지 이미 오래다.

리베카 솔닛

신작 ‘길 잃기 안내서’는 예술 비평가, 역사가, 페미니스트, 환경운동가라는 여러 정체성을 넘나들며 통찰력 있는 글을 쓰는 솔닛의 관점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했는지 그간 소개된 어떤 책보다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솔닛은 책에서 자신이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교외와 도시라는 풍경을 재탐색하고, 이민자 출신인 자기 가계도의 할머니들과 고모의 역사를 더듬어본다. 아울러 젊은 시절 예술에 대한 날카로운 감수성을 함께 길러온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솔닛의 에세이들은 언제나 방랑·탐색·모험 같은 주제를 주로 다루어왔는데 이번 신간에서도 이와 같은 주제들을 ‘길 잃기’라는 키워드를 통해 포괄했다.



책에서 솔닛이 제안하고 또 탐색하는 ‘길 잃기’는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경로다. 우리는 익숙한 장소를 떠나가거나, 사랑하는 누군가를 상실하는 등 인생을 살면서 길을 잃는 경험을 마주한다. 우리 모두 그 과정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변화를 겪는다. 이 변화는 때로는 고통을 동반하고, 때로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솔닛은 ‘길을 잃은’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역사 속에서, 예술 작품 속에서, 자신의 경험과 자연 속에서 찾아내 정체성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한다. 스페인 사람 카베사 데 바카는 정복을 위해 신대륙에 올랐지만 포로가 돼 먼 길을 걷고 원주민들의 환대를 받는 과정에서 정복자가 아닌 완전히 다른 존재로 바뀌는 ‘영혼의 변신’을 경험한다. 황금시대에 금을 찾기 위해 산맥 사이로 나섰다가 길을 잃은 ‘데스밸리 포티나이너스’는 식량도 물도 없는 그곳에서 처음의 목적을 잊고 금이 아닌 물을 원하게 된다.

이 책은 개인의 경험·예술·역사·철학을 넘나드는 솔닛 특유의 글쓰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비평 에세이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쉽게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러 번 곱씹어 보면서 예술 작품과 자연, 풍경에 대한 솔닛의 예민한 감식안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그녀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솔닛은 우리를 르네상스 화가들이 매혹되었던 푸른빛 속으로, 반항적 젊음 또는 성년의 회한을 노래한 펑크와 블루스의 세계로, 거북과 뱀을 이웃처럼 만나는 사막의 전경 속으로 이끈다.

‘길 잃기’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솔닛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만큼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솔닛은 이 책을 두고 자신이 “길 잃기에 사용하는 몇 점의 지도”라며 독자들에게 ‘길을 잃어보라’고 말한다. “길을 전혀 잃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길 잃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파국으로 이어지는 길이므로” 1만7,000원
/김현진기자 star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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