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준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전 유엔대사
인도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인권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접근 방식에 차이가 있다. 인권은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권리이고 국가가 이를 보장해줄 의무가 있다. 인도주의는 무슨 이유에서든 인간다운 삶과 존엄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사람들을 국적·인종·종교 등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는 정신과 활동이다. 도움을 주는 주체도 어떤 정부이든 국제기구이든 민간기구이든 모두 가능하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대홍수와 식량난으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 위기상황을 맞아 국제사회에 긴급 구호를 요청했고 이에 따라 인도적 지원의 대상이 됐다. 유엔은 매년 인도적 지원 필요성이 예상되는 국가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한다. 북한의 경우 대개 연간 1억달러 이상이 필요하다는 추정치를 제시해왔다. 2000년대 초반에는 2억~3억달러 수준의 모금이 가능해 큰 문제가 없었지만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제재 대상이 된 2006년 이후에는 목표액의 30% 달성도 어려워졌다. 사실 이러한 지원은 대부분 세계식량기구나 유니세프와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집행되기 때문에 대북제재에 위반이 될 가능성이 없고 구호 목적에 맞게 사용되도록 모니터링도 철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005년 이후 사실상 대북 인도지원을 중단하고 있으며 다른 공여국들도 지원 규모를 대폭 낮췄다. 게다가 미국의 금융제재와 북한 여행 금지 조치로 민간 구호기관들의 북한 활동이 어려워져 세이브더칠드런 등은 지난해 활동을 중단했다.
우리나라는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 있어 항상 선두 국가 중의 하나였다. 2013~2014년에는 다른 국가들이 지원을 줄이는 바람에 2년 연속 최대 지원국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6년에는 처음으로 대북 인도지원을 중지했는데 지난해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재개를 선언하고 800만달러 상당의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 인도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 아직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한반도 상황과 비핵화 현안을 놓고 볼 때 세 가지 고려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을 속히 재개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대북제재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북한에 시급한 지원을 해줄 수 있다. 국제기구들은 인도적 사업을 시행하기 전에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와의 협의를 거쳐 제재에 저촉되지 않도록 한다. 최근에도 유니세프의 대북 사업이 제재 위반이 되지 않는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지난 8월에는 미국의 주도로 대북 인도지원 사업의 제재위 검토 절차를 간소화하는 지침도 마련됐다. 미국 내에서도 상원의원 등 주요 인사들이 대북 인도지원의 필요성을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 북한이 김정은 위원장의 방한이나 2차 북미정상회담에 따른 성과를 기대할 때 대북 인도지원이 유용한 검토 대상이 된다고 본다. 비핵화 없이는 제재를 완화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직접 인도지원을 재개하는 방안을 검토하면 더욱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 미국과의 공조 유지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비핵화 없이는 실행이 불가능한 대북 경제협력과 관련된 제재 면제를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 인도적 지원에 중점을 두는 것이 미국에 대해 보다 분명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즉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 주민들의 인도적 위기를 방관할 수 없는 것이지, 북한 정부에 대한 비핵화 압박을 늦추려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할 수 있다.
셋째, 우리의 국제적 신뢰도와 긍정적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 현재의 대북제재 하에서도 인도적 지원을 계속하는 스위스·스웨덴·캐나다 등은 모두 국제사회에서 인도주의와 인권의 창달에 앞장서 높은 평가를 받는 국가들이다. 우리도 같은 맥락에서 우리 활동의 국제적 정당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남북관계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도 높이는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올겨울이 유난히 추울 것이라고 하는데 식량난과 연료난을 겪는 북한은 더욱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당장 실현이 어려운 남북 협력사업은 장기적 과제로 추구하고 우선 대북 인도지원으로 관심을 돌려야 할 때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