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더 나빠질 수는 없을거라 생각하면, 그냥 견딜만 해”
살아간다는건 그렇다. 더욱이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 갑작스런 사고, 3개월만에 깨어나 다리에 철심을 박고 축구선수의 꿈까지 포기한 이강두(이준호)의 하루엔 웃음이 없다. 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먹고 살겠다며 식당을 열었다가 사기당하고 너무 빨리 아버지의 곁으로 떠난 어머니. 그는 어린 동생의 무심함을 등에 업고 어떻게든 오늘만 견뎌내는 것이 인생이라 배웠다.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며 여인숙을 전전하는 삶. 그 비루한 삶 앞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문수가 나타난다. 멀쩡한 척 하지만 속은 더 이상 무너져버릴 곳 없는 마음을 그는 안다. 그녀와 가까워지며 강두는 처음으로 한번쯤 생각해본다. ‘멋진 놈이 한번쯤은 되어보고 싶다’고.
하문수(원진아)의 삶에는 여유가 없다. 새벽부터 엄마가 운영하는 목욕탕 산호장을 청소하고, 매표소에 앉아 주문받은 건물 모형을 만든다. 엄마는 술에 취해있고, 아빠는 집을 돌보지 않는다. 내가 웃지 않으면 누구도 웃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행’이라고 말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슬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나온 것이기에 더 슬프다.
계속 마주치는 강두는 불편하다. 자꾸만 감추려던 본모습을 끌어낸다. 어느 순간 내 감정을 모두 토해낸 문수는 처음으로 ‘속 시원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존재에서 둘도 없는 친구로, 내 사람으로 만들며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천천히 배워간다.
JTBC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사랑 이야기다. 닳고 닳았는지 모르는 뻔한 사랑. 남녀가 조금씩 관심을 갖고,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마음을 나누고, 두 손을 잡는. 드라마 속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건데 이들의 사랑은 요상하리만치 답답하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로의 마음으로 다가간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건 사랑의 본질이었다. 이강두와 하문수가 함께 안고 있는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사랑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10년 전 쇼핑몰 붕괴사고 이후 사람들에게 벽을 치고 살아온 이들이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 같은 곳을 보기까지, 이야기는 줄곧 현실적인 고통과 극복을 담아냈다.
사랑의 본질은 ‘남녀’ 사이에만 등장하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강두에게 욕 한바가지 씩은 퍼붓는 비밀병원 주인 마마(나문희), 남자에 대한 상처로 누구든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술집 마담 마리(윤세아), 자기가 동생이라 우기는 마음 착한 동네 형 상만(김강현)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늘 티격태격 하지만 없어서는 안될 식구다.
저마다의 상처, 그로 인해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이 마마의 병원에서 만나 화내고 싸우고 푸는 과정은 식구가 피를 나눈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란걸 말한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걱정, 언제든 그를 위해 달려갈 수 있는 마음. 식구라는 관계의 바탕에는 언제나 사랑이 내재된 것임을 마마의 수술 직전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의 웃음이 말한다.
작가의 따스한 시선은 소위 있는 자들에게로도 향했다. 성실했던 아버지가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것을 봐야 했던 서주원(이기우), 사태를 수습하기만 하면 그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정유진(강한나). 엇갈린 연인의 인연까지도 드라마다운 ‘완벽한 엔딩’이 아닌 서로가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모습을 통해 현실적인 그림을 그려냈다.
시청자들에게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현관문만 나서면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한겨울, 출근길 손난로처럼 따스함이 남은 작품이었다. 작품 안에서 이들이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고 곱씹으면 유독 그 시간만큼은 뭉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들이 스타트를 끊은 2018년 드라마의 사랑과 사람, 치유와 응원의 메시지는 이후 ‘라이브’와 ‘나의 아저씨’로 이어졌다.
/최상진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