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한국 야담의 서사세계] 관습 탈피의 언어…野談을 다시 보다

■이강옥 지음, 돌베개 펴냄


野談. ‘들 야(野)’와 ‘말씀 담(談)’을 결합한 이 단어의 뜻을 그대로 풀어보자면 들에 떠도는 이야기, 변두리의 이야기, 정식 문학으로는 채택되지 않은 잡설쯤 되겠다. 조선 후기에 주로 한문으로, 짤막하게 쓰인 야담은 그 이름에서 느껴지듯 오랜 기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고작 소설이라는 장르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의 미완성 문학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최고 권위의 조선 야담 연구자인 이강옥 영남대 교수는 독자적 문학의 갈래로서 야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당대인들의 이상향, 운명, 꿈, 절망과 아이러니, 대안적 욕망을 오롯이 담은 시대의 정수로서 문학적 가치를 입증한 것이다.

저자의 가장 큰 업적을 꼽자면 야담의 도식적 체계를 만드는 대신 이상향, 운명, 여성정욕 등을 키워드 삼아 새로운 담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저자 스스로도 연구를 시작하며 체계적인 갈래를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작품의 풍부한 지혜와 상상력을 왜곡하거나 은폐하기에 이르렀고 선입견과 도식으로부터 벗어나고서야 비로소 야담의 다채롭고 역동적인 모습을 다시 마주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야담은 해방의 언어요, 꿈의 총아다. 얼핏 읽으면 도덕적 나태함, 주체의 자기모순, 타락한 세상의 습관적 추종 등으로 읽힐 일련의 야담 작품들은 유가적 이념이나 상식적 관습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 속에서 야담 서술자들은 이념이나 규범, 양자택일의 이분법으로부터 독자들이 자유로워지길 권하고 상투적 규범이나 억압적인 선입견을 강요하는 집단에는 경고를 보내고 조롱하기도 했다.

이상향에 대한 호기심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도화원기 이후다. 저자는 이 시기가 현실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된 시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현실을 벗어난 이상향을 강렬하게 바라기 시작했고 이 호기심이 고스란히 야담에 담겼다고 소개한다.

야담에는 운명적 요소가 강하게 작동하기도 한다. 서술자는 주인공과 같은 자리에서 운명적 현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거리를 두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서술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운명론을 통해 절망에 빠진 주인공을 위로하는 경향을 보인다. 독자가 주인공의 절망을 내면화하면서 자기에 대한 연민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서사장치인 셈이다. 이는 소설을 읽으며 페이소스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과정과 유사하다.

이 책은 40여년을 야담 연구에 바쳐온 노학자가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해 내놓은 최종 보고서다. 그는 ‘청구야담’의 수많은 이본을 일일이 대조하고 오류를 찾아내 입말이 한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중 언어 현상’을 한국 야담의 독특한 특성으로 발견하는 업적을 남겼고 이를 책에서 충실하게 소개하기도 한다.

정년을 앞둔 지금까지도 저자는 야담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의 바람은 ‘서사의 바다’로서 야담이 제 위치를 인정받고 시대를 넘어 지금의 독자들에게 다시 읽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인물, 상충하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뒤섞이고 공존하는 야담이야말로 역동적인 서사요 민족의 말과 생각이 담긴 국민서사라는 의미에서다. 4만원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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