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1년 7개월, 그의 앞에 붙은 ‘개혁의 전도사’,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수호자’라는 수식어는 조금씩 자취를 감추고 있다. 유럽의 기대주 마크롱 대통령에게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나라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독선’과 ‘아집’이다. 이제껏 해 보지 못한 개혁을 ‘뚝심’ 있게 해 나간다는 측면에서 마크롱은 뭇 사람들로 하여금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이 ‘뚝심’은 이내 독선과 독주로 변질 됐다. 그의 변화는 그의 입에서 내뱉는 말에서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설화(舌禍)가 끊이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프랑스인을 “변화를 거부하는 골족”이라고 표현해 뭇매를 맞았다.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게으름뱅이’라고 하는가 하면, 시위를 벌이는 노조원을 겨냥해 “새 직업을 찾는 대신 문제를 휘젓고 있다”고 말해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취업이 안 되는 청년 조경사에게는 직업을 바꾸면 ‘일자리가 널려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 같은 그의 일방적 언행은 어느덧 ‘불통’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의 여러 가지 개혁에 대한 잇따른 강공 드라이브가 프랑스 국민들에게 ‘개혁 피로감’을 안겼다는 분석도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의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공공부문을 개혁하겠다면서 2022년까지 공무원 12만 명을 감축하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밖에도 노동, 입시제도 손질 등의 교육 개혁, 국회의원 숫자를 줄이는 개헌까지 시도하면서 동시다발적 개혁을 밀어붙였다. 주변부의 말을 듣고 곱씹을 틈도 없이 시도되는 개혁에 국민들이 강한 피로감을 느꼈다는 분석이다.
프랑스의 고유가 정책에 반발한 ‘노란조끼’ 시위대가 지난달 24일(현지시간)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독선’과 ‘아집’에 대한 실망감은 결국 ‘분노’로 폭발했다. 지난달 17일(현지시간) ‘노란조끼’를 입은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취임 이후 줄곧 ‘제왕적’ 국정운영 행보를 보여온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다. ‘노란 조끼’ 시위는 한 50대 여성이 페이스북에 올린 ‘프랑스는 어디로 가고 있나’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반향을 일으키며 탄생했다. 유류세 인상 반대에서 시작한 시위가 ‘부자 대통령’에 대한 반감과 맞물려 급속도로 확산 됐고, 정부 퇴진까지 주장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연일 정도가 심해지면서 결국 마크롱 대통령은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한 달 동안 이어진 시위가 자신에 대한 사퇴 요구로 번지며 정국을 뒤흔들자 마크롱 대통령은 그동안 반대해온 최저임금 인상 카드까지 내밀면서 국면 전환에 나섰다.
지난 10일 오후8시 파리 엘리제궁에서 대국민담화 발표를 위해 카메라 앞에 선 마크롱 대통령은 “(최근 사태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며 고개부터 숙였다. 취임 1년7개월 만에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은 그는 13여분간 이어진 대국민담화에서 “사회·경제적으로 긴급한 상황(emergency)”이라며 “폭력은 용인할 수 없지만 분노와 함께 표출된 국민의 요구는 대부분 합법적이었다”고 말해 자신의 과오를 시인했다.
유류세 인상 반대로 시작된 노란 조끼 시위가 발발한 지 약 한 달 만에 국민 앞에 선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내년 1월부터 근로자 최저임금 월 100유로(약 12만8,000원) 인상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현재 프랑스의 세후 최저임금은 월 1,165유로(약 150만원) 정도다. 마크롱 정권은 그동안 최저임금 인상이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감소를 초래할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고수해왔으나 그는 이날 담화에서 “우리는 일을 통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프랑스를 원한다”며 인상 방침을 밝혔다. 시간외근무에 따른 임금지급분에도 세금을 매기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이 같은 조치에 따른) 기업들의 추가 비용 부담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월 2,000유로(약 256만원) 미만을 버는 은퇴자에게 부과되는 사회보장기여금(CSG) 인상도 철회하기로 했다. 프랑스 정부는 내년 1월부터 은퇴자가 내야 하는 CSG를 1.7% 올릴 예정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대기업들이 사회보장에 더 기여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다음주께 재계 인사들과 만나 대책을 논의하겠다고도 했다. 우선 그는 “여력이 있는 기업은 연말에 비과세 보너스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노란 조끼 시위대의 요구를 상당수 수용하는 듯한 대책이지만 마크롱 대통령은 ‘부유세’의 원상복귀만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에게 ‘부자의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안겨준 부유세 부활을 끝내 거부한 ‘양보’가 민심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그는 취임 초부터 국가발전을 명목으로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주내용으로 한 친기업정책을 펴왔다. 투자 촉진을 명분으로 기존 ‘부유세’를 부동산자산세(IFI)로 축소 개편한 것 역시 이 같은 정책의 일환이다. 지난 7월 상하원 합동연설 당시 마크롱 대통령은 “기업을 돕는 정책은 부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것”이라며 자신을 향한 비판을 반박하기도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대국민담화에서도 “‘부유세’에서만큼은 후퇴가 없을 것”이라며 “여기서 뒤로 물러나면 일자리 창출에 악영향을 끼치고 프랑스는 약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의 대국민담화에 대한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AP통신은 “종합적으로 봤을 때 마크롱 대통령의 이번 담화에 근본적인 변화는 전혀 없었고 그저 그의 비전을 고수한 격”이었다고 평했다. 노란 조끼 시위대의 대변인 역할을 맡은 뱅자맹 코시는 “정치적 방향에서의 변화라기보다 일종의 예산조정”이라며 “프랑스인이 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했다.
‘노란 조끼’ 시위와 관련해 지난 10일(현지시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모양새다. 13일 ‘노란 조끼’ 시위와 관련해 의회에 제출된 대통령 불신임안은 부결됐지만, 마크롱 대통령의 앞에는 여전히 잔뜩 성나 있는 군중이 자리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11일 스트라스부르 크리스마스 시장에서는 무차별 총격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위를 멈춰달라”는 프랑스 법무부와 내무부의 강한 호소에도 ‘노란조끼’는 이번 주말(15일) 다섯 번째 시위를 이어간다. /김민정기자 jeong@sedaily.com